소개
동헌은 조선시대 지방 관아에서 고을의 원(員)이나 현감(縣監), 병사(兵使), 수사(水使), 감사(監司) 및 그 밖의 수령(守令)들이 주재하는 건물로 정무(政務)를 집행하고 공사(公事)를 처리하던 중심 건물을 말하며, 대청을 이르기도 한다. 지방의 일반 행정 업무와 재판 등이 동헌에서 행하여졌는데, 지방 관아는 중앙에 담과 정문을 내어 각종 집무실과 창고를 두고 주변에는 객사·향교 등 부속 건물을 둔다.
정문 안에 다시 담을 둘러 수령이 직접 공무를 수행하는 외아(外衙)와 수령의 가족들이 거주하는 내아(內衙)를 두고 외아·내아는 다시 담이나 행랑으로 구분한다. 동헌이란 명칭은 외아가 내아의 동쪽에 있는 데서 연유했다. 그러나 나중에는 동헌이 관아를 지칭하는 말이 되어 외동헌, 내동헌이라고도 부르게 되었다. 아사(衙舍)·군아(郡衙)·현아(縣衙)·시사청(視事廳) 등으로 부르기도 한다.
고려시대부터 공주목이 설치된 이후 지방 행정의 중심지로서 공주 건치(建治)가 비롯되었다. 조선시대에 들어 정3품의 공주목사는 세조(世祖) 때 시행된 진관(鎭管) 체계 수립에 따른 첨절제사(僉節制使)를 겸하게 되고, 예하에 임천군과 한산군의 2군 10현을 관할하게 되었다. 따라서 공주목 관아는 동헌을 비롯한 정청(政廳)들과 중앙 기관인 객사 외에 진영(鎭營)이 소속된 여러 건물들과 창고 건물?湧?지금 공주시 중동 도립병원 일대에 산재해 있었다.
『여지도서(輿地圖書)』에 나타난 공주목 소속 공해는 객사 32칸, 아사(衙舍) 26칸, 향소청(鄕所廳), 향사당(鄕射堂) 13칸, 군관청(軍官廳) 7칸, 작청(作廳) 10칸, 진무청(鎭撫廳) 7칸, 지인방(知印房) 3칸, 우영(右營) 15칸, 토포군관청(討捕軍官廳) 8칸, 기고청(旗鼓廳) 9칸, 작청(作廳) 6칸이었다. 창고 시설로는 대동고(大同庫) 20칸, 보역고(補役庫) 5칸, 관청고(官廳庫) 6칸이 주내(州內)에 있었고, 사창(司倉) 16칸이 공주 공산성 내에 그리고 동창(東倉)·서창(西倉)·남창(南倉)·북창(北倉)·유창(儒倉)이 주외(州外) 현에 배치되었다.
동헌은 장대석 두벌대로 기단을 쌓은 뒤에 각이 진 주춧돌 위에 각기둥을 세워 정면 8칸, 측면 4칸의 평면을 구성했다. 8.2척 주간(柱間)으로 등간격을 준 7칸 내진(內陣)의 전후로 반 칸의 툇마루를 돌리고, 동쪽 측면에도 같은 툇간을 둠으로써 정면 8칸이 되었다. 전퇴 부분은 창호 없이 개방되고 안쪽 중앙 3칸은 우물마루를 깔은 대청 우측변은 온돌방 2칸이다.
중앙 대청 우측의 2칸은 마룻바닥이나 4면 창호로 구획되고 대청을 중심으로 한 양쪽 측면 벽도 모두 4분합(四分閤)으로 접어서 들 수 있는 구조이다. 납도리, 홑처마로 2고주(二高柱) 이중의 대들보 7가연(七架椽)의 단출한 목조 팔작지붕이다. 선화당(宣化堂)과 포정사(布政司) 등 감영 건물에 비해서는 너무나 섬세한 용재 쓰임 등 단조로운 관아 건물이다.
정3품 관원이 주재하는 공주목의 치호(治戶) 품계로 보아서는 동헌 건물이 너무 왜소할 뿐 아니라 각기둥, 무익공, 납도리, 처마 구성 등이 평범한 전각 구조와 다를 바 없어 동헌 중심 건물로서의 위풍이 없는 듯 느껴지나 이는 감영 앞에 존재하는 겸양함이 발휘된 것으로도 볼 수 있다.
공주목의 동헌 건물이 도립병원 건립 당시 대책 없이 철거되어 1980년대 중반 금성동 산기슭인 황새바위 밑에 복원되었는데, 또다시 소실됨으로써 곰나루 변 문화재단지 선화당 앞마당에 새롭게 이전 재축되었다. 본래 감영과는 다른 위치에서 각기 여러 동의 부속 전각을 거느리고 웅위 하던 동헌이 감영 일곽 경내에 옮겨지게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