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주지역에 언제부터 사람들이 살기 시작하였는가를 알기 위해서는 먼저 우리들이 생활하고 있는 지구의 역사와 지구상에 인류가 출현하는 과정을 간단하게 살펴 볼 필요가 있다. 지구의 역사는 원생대·고생대·중생대·신생대로 구분되고 있다. 이 가운데, 신생대는 제3기와 제4기로 나누어지며, 제4기는 다시 홍적세와 충적세로 이루어져 있다. 인류는 신생대 제3기말에 지구상에 출현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연장을 만들어 사용하기 시작한 것은 약 250만년 전부터 시작되는 신생대 제4기 홍적세부터이다.
이 때, 도구는 돌을 깨뜨려서 만들었기 때문에, 이를 뗀석기(打製石器)라고하며, 이러한 도구를 사용하던 시기를 구석기시대라고 한다.
공주지역 구석기문화는 우리나라 구석기문화의 전개와 그 맥을 같이하고 있다. 우리나라의 역사가 구석기시대 전기부터 시작되었음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며, 제일 먼저 알려진 유적은 함북 종성의 동관진유적이나, 구석기시대의 유적이 본격적으로 조사되기 시작한 것은 1960년대에 들어와서부터이다. 1962년 함북 웅기의 굴포리유적이 조사되었고, 이어 1964년에 남한에서는 처음으로 공주의 석장리유적이 조사됨으로써 우리나리에서 구석기의 존재가 분명한 모습을 드러내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후, 전국 각지에서 많은 유적들이 조사됨으로써 구석기인들이 전국 각지에 분포되어 생활하였음을 알 수가 있다.
구석기시대의 유적은 동굴을 비롯하여, 바위그늘·평지 등에서 발견되고 있으며, 대개 햇빛이 잘 비치고 강이나 물가에서 가까운 곳에 자리잡고 있는데, 공주 석장리유적의 경우는 평지유적으로 구석기인들이 선호했던 생활환경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구석기인들은 주로 나무열매나 뿌리 등을 채집하거나 동물을 잡아서 먹고 살았는데, 이 때 돌을 깨뜨려 만든 도구 또는 동물의 뼈나 뿔을 다듬어서 만든 골각기 등을 사용하였다. 이들 도구의 종류는 용도에 따라 다양한데, 사냥도구로는 주먹도끼, 찍개·찌르개 등이 있으며, 요리도구로는 긁개, 밀개, 공구로는 새기개 등이 있다. 특히, 충북 단양의 수양개유적에서는 이러한 석기를 만들던 석기제작지가 발견되기도 하였다.
구석기시대의 생활은 주로 채집과 수렵에 의존하였다. 특히, 동물을 사냥하기 위해서는 집단적인 협동이 필요하였을 것이다. 따라서, 일정 규모의 공동체 생활을 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러한 사실은 석장리의 집자리유적이 8~10명 정도의 인원이 살았을 추정되고 있는 점을 통해 증명되고 있다. 그러나 공동체 조직의 구체적인 모습은 잘 알 수 없다. 그리고 소박하지만 사람이나 동물을 조각한 유물이 보고되고 있는 것으로 보아 구석기인들의 예술활동을 추측할 수 있는데, 이러한 활동은 주로 주술적인 신앙과 관련이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면, 공주지역에서 조사된 유적, 유물들을 통해 당시 이 지역에서 구석기인들이 어떠한 생활을 하였는지 구체적으로 살펴보기로 하겠다.
공주는 한강 이남에서 처음으로 구석기유물이 발견된 장기면 석장리를 비롯하여 반포면 마암리의 용굴, 시목동, 소학동, 장기면 금암리 등지에서 다양한 구석기유물이 발견되어, 일찍부터 사람들의 삶의 터전으로서 적합한 환경을 구비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석장리유적은 금강과 산록 완사면이 만나는 지대에 위치하고 있다. 유적의 존재는 1964년 5월 홍수에 의해 강둑이 무너짐으로써 확인되었다. 유적에 대한 발굴조사는 1964년 11월 22일에 처음 이루어진 이후 1974년까지 10년간에 걸쳐 조사가 이루어졌으며, 1990년과 1992년에 11, 12차 조사가 추가로 실시되었다. 그 결과, 불모지와 같았던 우리나라 구석기문화의 체계를 세워 놓았을 뿐만 아니라, 우리 역사를 구석기시대까지 올릴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되었다.
석장리유적은 제1·2지구로 나뉘는데, 1지구에서는 후기 집터층에서 2만 8천년 전과 그 아래층에서 3만 6백년 전의 연대가 밝혀졌다. 2지구에서는 절대연대가 밝혀진 것은 없으나 여러층위에서 사람이 살았으며, 그들의 석기 제작기술은 외날찍개, 양날찍개, 이른 주먹도끼, 발달된 주먹도끼 및 격지긁개,돌날석기, 새기개, 좀돌날등의 단계를 거쳐 발달하였다.
조사 결과, 석장리유적은 전기 구석기부터 후기 구석기까지 형성된 문화층으로 밝혀졌다. 맨 아래층의 외날찍개 문화층은 암반층인 석비레층 위에 바로 쌓인 층으로, 제2빙하기인 55~45만년전 사이에 이루어진 층이고, 2문화층은 제3빙하기인 35~32만년전사이, 3·4문화층은 21만년전의 제3빙하기 뒤쪽으로, 5문화층은 18만년전의 빙하기, 6문화층은 제3간빙기인 12만년경전으로 각각 추정된다. 중기구석기 성격을 지닌 자갈돌 찍개 문화층은 따뜻한 기후아래 이루어진 것으로 그 아래쪽의 찰흙층에서 산화철이 굳어서 이루어진 뿌리테가 나왔다. 이 층의 석기들은 아슐리앙 전통의 주먹도끼, 돌려떼기 수법의 몸돌, 격지돌이 있어, 7만~6만년전 쯤으로 추정된다. 8·9문화층은 제4빙하기에 이루어진 6만~5만년전으로, 10·11문화층은 3~2만년전으로 각각 추정되고 있다.
특히, 석장리에서 조사된 후기 구석기시대에 속하는 평지의 집자리는 비교적 상세하게 조사가 이루어짐으로써, 구석기인들이 어떠한 방식으로 생활하였는가를 이해하는데 좋은 자료가 되고 있다. 집자리는 담을 쳐서 집을 바깥과 구별하고, 출입하는 문을 만들었으며, 기둥을 세우고 움막을 쳐서 비바람으로부터 보호하였다. 그 안에 살던 사람의 수는 8~10명 정도로 추정되고 있는데, 혈연관계에 있는 가족들로 구성되었을 것이다. 이들은 공동체생활을 하면서 집단적인 협동을 통해 동물을 사냥하고나 사나운 맹수 등으로부터 자신들을 보호하였을 것이다. 주거지 내부에서는 화덕자리가 조사되었는데, 화덕은 둥그스럼한 자갈돌 7개를 둘러 놓았다. 석장리인들은 불을 이용하여 요리를 하고, 추위도 막았던 것으로 추측된다. 그리고 집 앞에서는 잔격지들이 많이 나오고 있어 석기를 만들던 곳이었음을 보여준다.
석장리 주거지에서는 고래를 땅바닥에 새긴 것, 물고기 머리를 둘을 떼고 선으로 새기고 눈을 둥글게 돌려 굼파기 한 것 등 예술작품으로 추정되는 유물들도 출토되어 구석기인들의 예술활동을 엿볼 수 있기도 하다. 비록, 공주지역에서 구석기시대 주거유적이 석장리에서만 조사되었지만, 당시 금강주변에는 석장리와 같은 생활유적들이 곳곳에 존재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석장리 구석기유적의 발굴은 우리나라에 구석기시대부터 사람이 살았고, 여러 문화층이 단계적으로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밝혀 주었으며, 우리나라 구석기 유적의 조사·발굴·연구가 체계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하다. 석장리유적이 지닌 의의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그리고, 동굴유적인 반포면 마암리의 속칭 '용굴'이란 곳에서도 구석기시대의 생활흔적이 조사되었다. 이 동굴유적은 금강 남안, 계룡산 북쪽 산줄기 사면에 위치한다. 동굴은 높이 20m 가량의 위치에서 입구를 동쪽으로 하고 있으며, 굴 입구의 크기는 너비9m, 높이1m이었으나. 그 안은 길이 24m, 너비 7~12m, 높이 3m이며, 30~50cm 정도의 퇴적층이 바닥에 깔려 있었다고 한다. 이 곳에서는 석영반암(石英斑岩)의 석재로 만든 찍개, 찌르개, 긁개 및 돌날형 박편 등의 석기가 출토되었는데, 석장리유적의 상층과 연결될 수 있는 것으로 파악된다. 따라서, 이 동굴유적은 석장리유적과 함께 공주지역에서 생활한 구석기인들의 모습을 알 수 있는 중요한 유적이다. 이외에도 공주시 시목동,소학동,장기면 금암리 등에서 구석기시대의 유물이 수습되었는데, 이들 지역은 모두 금강과 인접한 곳이다.
이와 같이 공주지역은 다양한 구석기시대 유적이 존재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 존속시기도 구석기 전기부터 후기까지 지속되었다. 구석기인들은 수렵·채집생활을 하였기 때문에, 활동영역이 농경인들에 비해 매우 넓은데, 주 생활근거지는 대부분 물이 풍부한 강이나 호수 주변에 위치하고 있다. 따라서 금강을 끼고 있는 공주지역은 구석기인들의 생활에 적합한 자연환경을 제공하고 있었을 것이며, 금강유역에 분포하고 있는 구석기유적은 바로 그러한 사실을 실증적으로 보여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