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신행등록(通信行謄錄) - 表題 : 辛未通信日錄
통신사란 신의를 교환한다는 뜻으로 통신사는 조선국왕이 일본 막부의 장군에게 파견하였던 공식적 외교사절이었습니다. 파견절차는 일본에서 새로운 막부장군의 승습이 결정되면, 대마도주는 막부의 명령을 받아 통신사청래차왜(通信使請來差倭)를 조선에 파견하였습니다.
이에 따라 조선 조정에서는 중앙관리 3인 이하로 정사·부사·서장관을 임명하고 300~500명으로 구성되는 사절단을 편성하였습니다. 여정은 한양을 출발하여 부산까지는 육로로 간 뒤, 부산에서부터는 대마도주의 안내를 받아 해로를 이용하여 대마도를 거쳐 시모노세키[下關]를 통과하여 일본 각번의 향응을 받으며 오사카[大阪]의 요도우라[淀浦]에 상륙하였습니다. 그뒤 육로로 교토로 갔습니다. 조선 전기에는 이곳에 장군이 있었기 때문에 교토가 종점이었지만, 조선 후기에는 장군이 도쿄[東京]에 있었기 때문에 목적지가 도쿄가 되었습니다.
교린에 대한 업무를 담당한 예조 전객사(典客司)에서 날짜순으로 엮었으며, 1607년(선조 40)부터 1811년(순조 11)까지 12차례의 통신사행 가운데 1811년에 파견된 12번째 통신사에 대한 기록이 담겨 있습니다. 이때 통신정사로 김이교가 임명되었습니다.내용은 경상감사외 동래부사 등 대일외교의 일선을 담당한 지방관의 보고와, 예조 또는 비변사에서 그것에 대해 논의하고 처리한 문서를 수록하였습니다.
구체적인 사항은 왜선의 도래, 일본 외교관인 차왜(差倭)의 출래, 접위관(接慰官)과 담당 역관의 차출, 차왜 접대, 차왜가 가져온 외교문서인 서계(書契)와 물품 기증서인 별폭(別幅)의 상송(上送), 답례품 마련, 차비역관의 파견, 일본의 통신사 파견 요청, 통신사 파견에 대한 규정 작성, 통신사 파견, 귀환 후 일본에서 받아 온 문서 및 진상품, 통신사를 수행해 온 차왜의 접대와 그의 귀환에 대한 것들입니다.
원문서가 그대로 필사되어 번다한 한편, 차왜가 가져온 서계와 기증품의 내용 등 당시 상황을 그대로 알 수 있습니다. 다만 통신사가 일본에서 활동한 상황을 예물 및 문서의 증여나 도중 기착지에서의 활동상황 등이 극히 간략하게 다루어졌을 뿐 구체적 외교 업무나 개인적 활동은 실려 있지 않습니다.
통신행등록
김이교(金履喬, 1764(영조 40)∼1832(순조 32).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안동. 자는 공세(公世), 호는 죽리(竹里). 관찰사 방행(方行)의 아들입니다.
1811년 2월 12일 통신사의 사명을 띠고 대마도에 건너가서 국서를 전달하였습니다. 1831년 우의정에 올라 국정을 도맡아 수행했습니다.
순조 묘정에 배향되었으며 저서에 《죽리집》이 있습니다. 시호는 문정(文貞)입니다.
김이교의 초상화로 1810년 일본통신사에 임명되었을 당시에 그려진 것이라고 추정됩니다. 이 초상화는 직무를 볼 때 쓰는 관모와 가슴에 2마리 학이 수놓인 흉배가 있는 자주색 비단 관복을 입고 있고 허리에는 금장식의 각대가 보입니다. 금장식의 각대는 종2품 이상만 착용할 수 있습니다. 오른쪽을 바라보며 앉은 반신상으로 흰 수염이 선명하며, 얼굴은 연홍색으로 가는 선을 이용하여 윤곽을 표현하였습니다.
김이교의 초상화로 1820년대 후반 내지 1830년대 초반 정승을 지내고 있을 무렵에 그려진 것으로 추정됩니다. 이 초상화는 정면을 바라보고 있는 반신상으로 흰 수염과 짙은 눈썹이 선명하며, 얼굴은 옅은 검은색 선을 이용하여 윤곽을 표현하였습니다. 직무를 볼 때 쓰는 사모(紗帽)와 분홍색의 관복[時服;紅團領)을 입고 있는며, 허리의 관대는 정1품이 차는 서대(犀帶)로 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