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령왕릉 출토품들은 남조문화의 영향을 농후하게 반영하고 있으며 금속공예품에 있어서도 정교한 제작기술을 발휘한 다양한 작품의 출현이 가능하였다. 무령왕릉의 부장품은 그 하한이 525년경인 웅진도읍기 말기에 해당되며 이 시기 무령왕의 재임기를 전후하여 백제문화는 그 성숙기를 맞게 되었다.
무령왕릉의 부장품에서는 그러한 남조문화의 화려하고 완숙한 기량을 보여주고 있다. 또한 이들 금속공예품은 왕실 부장품이라는 특성상 당시로서는 가장 진보적인 역량과 정성을 동원하여 제작하였겠지만 개개의 작품이 지니는 놀라우리만치 정교한 제작기술과 참신한 조형감각은 신라, 고구려와는 또 다른 백제적인 미의식을 보여주고 있다.
웅진도읍기의 이식(귀걸이)은 매우 화려하며 신라.가야.왜의 이식(귀고리)과 형태 및 재작기법이 유사하여 국제적인 성격을 보인다.
웅진도읍기의 이식은 공주 송산리 6호분(금), 무령왕릉(금), 전 송산리(금), 교촌리(금), 주미리 3호묘(금), 익산 입점리 1호묘(세환은 금동, 중간.수하식은 금)출토품이 있다. 재질은 금이 많으며 제작기법이 앞시기보다 더욱 복잡하고 화려해진다. 기록에 의하면 백제의 왕들은 금꽃으로 꾸민 오라관(烏羅冠)을 썼다고 하는데, 무령왕릉의 관식은 실제로 금관을 오려 만들었다.
왕의 관식은 인동(忍冬) 무늬를 기본으로 하여 꽃가지에 날개장식을 달았고, 왕비 관식은 중앙의 연화대(蓮花臺) 위에 꽃병 모양을 좌우 대칭으로 배치한 독특한 모습이다.
무령왕릉의 금속공예품은 이러한 관식을 비롯하여 금동제 신발.과대 및 요패, 귀걸이와 목걸이, 팔찌, 뒤꽂이 등의 장신구류가 주류를 이루지만 화려한 의장의 환두대도(換頭大刀) 및 장도(長刀), 그리고 청동거울과 청동그릇, 동탁은잔(洞托銀盞), 청동다리미를 비롯한 청동 숟가락, 젓가락과 같은 일반 생활금속공예품도 함께 발견되었다는데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이곳에는 당시 금속공예의 다양한 주조기법과 투각(透刻).선조(線彫).타출(打出)과 같은 장식기법이 총망라되어 있을 정도로 놀라운 금공기술이 가미되어 있다.
그 가운데 주목되는 것은 명문이 새겨진 왕비의 팔찌로서 다리(多利)라는 장인에 의해 520년에 제작되었음을 밝혀주고 있으며, 마치 날아가는 제비를 연상케 하듯이 그 끝단을 3개의 꼬리 모양으로 가른 금제 뒤꽂이는 표면에 타출기법으로 연화와 당초무늬를 꾸몄다.
은제탁잔에는 진기한 새와 동물, 용 등을 산악과 함께 배치하여 당시 사상적 측면을 반영해 주고 있으며 이밖에도 금판을 감싸 수리한 청동숟가락이나 근대까지 형태의 변화 없이 계승된 다리미는 다른 곳에서 찾아볼 수 없엇던 독특한 유물인점에 백제 금속공예의 우수성과 선구자적 위치를 다시 한번 증명해 준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금속공예품의 제작기술이 토대가 되어 백제 금속공예품의 정수라 할 수 있는 부여 능산리 절터에서 나온 금동대향로와 같은 걸작을 낳을 수 있었던 것이다. (최응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