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시대(三國時代)로 불리는 고대사회가 성립되기 이전에 이들 지역에는 각지에 크고 작은 소국(小國)들이 존재하였다. 일반적으로, 이 시기를 원삼국시대(原三國時代)라고 부르며, 기원 전후한 시기부터 대략 300년 경까지 해당된다. 우리나라에서 원삼국시대는 선사시대(先史時代)에서 진정한 의미의 역사시대(歷史時代)로 전환되어 가는 과도기적인 시기로서 역사학적으로나 고고학적으로 매우 중요한 시기이다. <삼국지> 나 <후한서>등의 중국 문헌에 따르면, 원삼국시대 경기 이남지역에서는 마한(馬韓) 54국, 진한(辰韓) 12국, 변한(弁韓) 12국이 있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 가운데 마한 54국은 오늘날의 경기도·충청도·전라도 지역에, 진한 12국은 경상도의 낙동강 동쪽, 변한 12국은 경상도의 낙동강 서쪽지역으로 비정되고 있다.
그 가운데, 제일 큰 세력은 마한인데, 큰 나라는 1만여 가( ), 작은 나라는 수천 가( )로 이루어졌으며, 합하면 10여만 호(戶)였다. 진한과 변한은 큰 나라가 4~5천 가, 작은 나라가 6~7백 가가 되었으며, 합하면 모두 4~5만여 호에 달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들 소국들 가운데 그 위치를 분명하게 알 수 있는 나라는 많지 않다.
원삼국시대에는 청동기의 실용성이 소멸되고, 철기생산이 본격화되면서, 각종 농·공구류가 철제로 만들어져 농업생산력의 향상을 가져왔다. 또한, 토기제작에 있어서 회전판의 사용으로 대량생산이 가능해 졌으며, 밀폐된 가마의 사용으로 높은 온도에서 굽게 되어 전보다 훨씬 단단한 토기를 생산할 수 있게 되었다. 이와 같은 기술의 발전과 더불어, 농경 특히, 벼농사의 발전으로 인한 농업생산력의 향상을 가져왔으며, 그로 인해, 인구의 증가와 계급의 분화가 빠르게 진행되는 등 급격한 사회변화가 이루어졌다.
농업의 발달로 기풍제와 추수감사제가 행하여졌는데(부여의 영고, 고구려 동맹, 동예의 무천), 이러한 종교적 의식에는 온 나라 사람들이 모여서 연일 음식과 술, 노래와 춤을 즐겼다고 한다. 종교적 제의(祭儀)를 주관한 제사장은 '천군(天君)'으로 불렸으며, 별도의 영역인 소도(蘇塗)를 관할하였는데, 죄인이 이곳에 도망가도 잡아가지 못하였다고 한다. 이는 전문적인 제사장의 출현과 제정(祭政)의 분리를 의미하는 것이다. 또한, 영혼의 불멸을 믿고 장례를 후하게 지냈는데, 가장(家長)이나 왕위(王位)가 부자상속에 의해 이루어지면서 조상에 대한 제사의례도 발전하였다.
원삼국시대의 사회상은 현재까지 전해지고 있는 법률을 통해서도 파악할 수 있다. 고조선의 경우 8조목의 법조문이 있었던 것으로 기록되고 있는데, 그 가운데 살인과 상해, 절도를 금하는 3조목이 전해지고 있으며, 부여의 경우 간음을 금하고, 투기가 심한 부인을 사형에 처하는 등의 법이 있었다. 이를 통해, 원삼국시대에는 살인·상해·절도·간음·투기 등을 금하는 법률이 제정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상과 같이, 원삼국사회는 철제 농공구의 발달과 농업의 발달 등을 통한 경제력의 성장을 기반으로 인구가 증가하고, 그에 따라 정치구조가 점차 확립되어 갔다. 이와 같은 사회·경제적 변화는 공주지역도 예외가 아니었으며, 곳곳에 많은 읍락들이 형성되어 갔을 것이다.
원삼국시대(原三國時代)에 공주는 마한(馬韓)의 영역에 속하였다. <후한서> · <삼국지> 등의 중국 역사서에 마한 54국의 명칭이 보이고 있으나 마한을 구성한 54국의 위치는 아직 분명하게 알 수 없다. 다만, 마한지역 성읍국가(城邑國家)의 영역은 대략 50리 내외의 반경을 가졌으며, 인구는 약 만명 정도였을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공주지역에는 불운국(不雲國), 또는 감원비리국(監爰卑離國)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그렇지만, 공주지역은 금강을 비롯하여 다수의 소하천을 끼고 발달한 농경지가 분포하고 있어, 당시 농경의 발달에 따라 사람들이 생활하기에 좋은 지리적 조건을 구비하고 있었다. 현재, 공주 각 지역에서 당시의 생활흔적들이 발견되고 있는 것으로 보아, 많은 사람들이 거주하였음을 알 수 있다.
마한시대의 사회상을 보여주는 유적으로는 토광묘와 주거지가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데, 공주지역에서도 이들 유구가 다수 조사되어 마한시대의 생활상을 이해하는데 많은 자료를 제공해 주고 있다.
먼저, 집단 매장시설이 확인된 장기면 하봉리의 경우 목곽묘 1기, 목관묘 15기, 옹관묘 3기, 구상유구 1기, 제사유구 4기, 용도를 알 수 없는 수혈 2기 등이 조사되었다. 출토유물로는 토기류 40여 점, 옥류 18점, 철기류 11점 등이며, 주변에서는 흑요석 1점과 무문토기편, 석기편 일부가 수습되었다. 하봉리 유적이 지닌 특징으로는 첫째, 공주일원에서 원삼국시대의 유적이 확인됨으로써 그간 공백기로 남아있던 선사시대와 백제시대의 연결을 가능하게 하였다는 점, 둘째, 하봉리유적이 목관묘를 중심으로 하고, 주구(周溝)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은 기존에 조사된 인근의 천안 청당동유적 및 송절동유적 등과 같은 문화권에 속하는 것으로 마한의 여러 소국과 관련지어 연구될 수 있다는 점, 셋째, 유구에 딸린 제사 흔적이 발견됨으로써 당시의 장제(葬制) 및 묘제(墓制)와 관련하여 사회상의 일부를 복원할 수 있는 여지가 마련되었다는 점 등이다. 따라서, 하봉리유적이 포함된 장기지역은 원삼국시대 마한제국 가운데 한 소국이 존재했을 가능성도 제기되고 있다.
원삼국시대는 성읍(城邑)을 중심으로 통치체제가 갖추어져 있었는데, 의당면 수촌리에서 조사된 토성(土城)은 마한의 여러 소국의 모습을 이해할 수 있는 좋은 자료를 제공하여 주고 있다. 당시, 지배계층은 성읍 안에서 거주하면서 촌락에 사는 농민들을 지배하였는데, 성읍(城邑)은 나지막한 구릉에 토성으로 축조되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기 때문이다. 수촌리토성은 해발 30m의 낮은 능선 위에 위치하고 있는데, 이 능선은 공주일원에서 가장 넓은 뜰 중에 하나인 수촌뜰의 한 가운데 자리잡고 있다. 현재 남아있는 성벽의 높이는 4.5m내외이며, 보루와 접해있는 부분 약 20m정도가 남아있다. 이 토성은 공주시 의당면 일대의 평지를 생활근거지로 한 집단의 치성(治城)으로 추정되고 있는데, 4세기 이전의 토성에 대한 정식 학술조사가 이루어졌다는 점에서 마한시대 소국의 존재를 연구하는데 중요한 자료로서 가치를 지니고 있다. 뿐만 아니라, 이제까지 여러 소국들의 위치비정이 주로 지리고증학적인 측면에서 이루어져 왔으나 토성에 대한 조사를 통해 실증적으로 위치비정이 이루어질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비록 토성의 존재가 확인되고 있지는 않지만, 탄천면 이인지역도 원삼국시대의 유물이 빈번하게 출토되어 있어 마한의 한 소국이 존재했을 가능성을 추정할 수 있다.
최근에, 탄천면 장선리유적에서는 주거지로 판단되는 토실(土室)유구 38기와 장방혈 수혈유구, 부뚜막시설이 갖추어진 방형주거지 1기, 토기요지 1기, 무덤 1기가 조사되었다. 조사지역의 지형적 조건을 보면 주변이 해발 150m내외의 높고 낮은 산등선으로 연결되고 있으며, 유적은 서북쪽의 해발 120m내외의 산에서 동남쪽으로 길게 흘러내린 구릉의 중상단부에 위치하고 있다. 그리고, 앞에는 우교천이 북에서 남으로 흘러 금강에 합류하고 있으며, 주변에는 넓은 평야가 펼쳐져 있다.
이 곳에서 조사된 유구 가운데 가장 주목되는 것은 토실(土室) 유구이다. 이들 유구는 표토를 지하로 장방형 내지는 원형으로 판 다음 그 바닥면에서 다시 수직으로 파 내려간 후에 옆으로 수평되게 토실을 만든 형태가 기본을 이루고 있다. 토실의 형태는 원형이나 방형, 사다리꼴의 평면형태이며, 천장은 궁륭형(穹 形)이다. 토실의 수는 1~3개 정도이며, 그 형식은 4~5유형으로 구분될 수 있다. 출토유물로는 적갈색 또는 회갈색 연질토기가 주류를 이루고 있는데, 장란형토기·파수부토기·발·대접·시루 등 다양한 토기류와 철정 1점 등이 있다.
이 토실유구는 내부 바닥에 목탄이 섞인 점토를 다지고 있는 점이나 환기시설, 내부의 불탄자리 등으로 보아 주거지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그런데 이들 유구가 주거지일 경우 <삼국지(三國志)> ‘위지 동이전 마한조’에 기록된 ”초옥토실(草屋土室)을 만들어 거처했는데 형태가 무덤과 같으며, 출입구는 위에 있고, 가족이 모두 그 안에서 생활하여 장유(長幼) 남녀(男女)의 구별이 없다”라는 내용의 마한 주거형태와 매우 흡사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따라서 장선리에서 조사된 토실유구는 이제까지 알려지지 않은 마한시대 주거의 한 유형으로 파악할 수 있으며, 아울러 문헌기록과 고고학적 양상이 서로 일치하는 획기적인 유적이라고 하겠다. 그리고 이 유적은 당시 일반인들의 주거생활을 파악할 수 있는 좋은 자료가 된다는 점에서 그 의의가 더욱 크다.
또한, 토실유구와 함께 당시의 생활지표면에서 부뚜막시설이 조사되었다. 이들 부뚜막시설은 주거지 밖에 위치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주거와 취사를 위한 공간이 서로 구분되어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즉, 토실주거지는 주로 잠을 잘 때 이용되었으며, 취사를 비롯한 평상시의 생활은 야외에서 이루어졌던 것으로 추정해 볼 수 있는 것이다.
특히, 독립적인 구릉지대의 수 십기의 다양한 생활유구가 조사됨으로써 당시 촌락의 규모나 성격 등을 파악할 수 있으며, 주거지의 규모나 배치상태 등을 통해 가족분화 내지는 혈연관계 등을 유추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그리고, 토실유구 안에서 출토된 철정(鐵鋌)은 다른 지역과의 교류관계를 보여주는 자료라고 할 수 있다. 장선리 토실유적은 이제까지 조사된 예가 없는 새로운 마한의 주거형태를 보여 주는 것으로, 원삼국시대 마한의 사회상을 밝히는데 아주 중요한 자료를 제공하고 있다.
그리고 우성면 귀산리의 공주-연기간 국도 36호선 확장공사 과정에서 가마터 2기가 조사되었다. 가마에서 출토된 유물은 공주 하봉리유적의 옹관으로 사용된 옹형토기(甕形土器) 구연부편 및 원삼국시대의 토기편이 소량 수습되었다. 이 유적은 당시 사람들의 교류관계를 비롯해 토기생산체계 등을 밝히는데 좋은 자료를 제공하였다. 또한, 우성면 상서리에서는 주구묘(周溝墓) 1기가 조사되었는데, 승석문이 찍힌 원저단경호가 출토되었다. 이 곳에서는 무문토기편도 다수 수습되고 있어, 선사시대의 취락도 존재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공주지역에서 조사된 원삼국시대 유적은 주로 소하천을 끼고 있는 넓은 평야지대와 인접한 지역에 분포하고 있으며, 대부분 청동기시대의 유적과 중복되고 있다. 이러한 현상은 농경이 본격적으로 실시된 청동기시대 이후부터는 대개 소하천을 끼고 발달한 평야지대가 분포하고 있는 지역이 생활하기에 적합한 지형적 조건을 제공하였기 때문이다. 공주지역은 금강의 지류인 소하천들이 곳곳에 흐르고 있어, 농경에 적합한 조건을 구비하고 있었다. 따라서, 많은 지역에 읍락들이 형성되어 있었을 것이다. 이러한 읍락들이 연합하여 소국(小國)을 이루었으며, 공주지역에 위치하였을 것으로 비정되는 불운국(不雲國), 또는 감원비리국(監爰卑離國)도 이러한 문화적 배경을 토대로 성립된 소국(小國)이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