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5년 초겨울 고구려 군대의 강습으로, 백제는 지금의 서울 지역에 소재한 수도 한성을 상실하고 말았다. 백제는 한번 망하다시피 했던 것이다. 그러나 지금의 공주땅인 웅진성(熊津城)에 새로운 국가의 터전을 급히 마련하였다.
개로왕의 아우인 문주왕은 신라에 파견되어 1만명의 구원군을 이끌고 왔으나, 이미 파국(破局)을 맞은 후였다. 그러한 상황에서 문주왕은 즉위하였지만, 난세(亂世)의 군주로는 적합하지 않은 우유부단한 성품이었다. 물론, 문주왕은 백성들을 사랑하고 또 사랑받는 군주였지만, 비상시국을 냉혹한 의지로 극복할 수 있는 임금은 되지 못하였다.
왕실의 권위는 실추될대로 실추된 상황이었다. 476년 봄, 문주왕은 남중국에 소재한 유송(劉宋)에 사신을 파견하여 외교적 고립에서 벗어나고자 하였다.
유송 정권은 458년에 개로왕이 보낸 관작 요청 문서를 받고, 그것을 내려준 바 있다. 그 11명 가운데 보국장군(輔國將軍)을 제수받은 여도(餘都)라는 왕족이 기실 문주왕이었다. 문주왕은 유송에 그 존재가 알려졌던 바, 그러한 외교적 관계에 힘입어 백제의 국제적 위상을 회복하고자 한 것이다. 그러나, 불행히도 연안 항해를 하던 백제 선단은 고구려 수군이 항로를 차단함에 따라 되돌아 오고 말았다. 문주황은 초조하지 않을 수 없었다. 고구려는 백제를 철저하게 파괴시켜 재기불능으로 만들었다고 선전하고 다녔을 수 있다. 그러나 중국 대륙에는 그러한 주장이 잘못되었음을 말할 수 있는 백제 사신의 그림자는 비칠수도 없었기 때문이다.
같은 해 4월에는 탐라국(지금의 제주도)의 사신이 백제 조정에 도착하여 토산물을 바쳤다. 백제의 중심축이 지금의 서울 지역에서 공주 땅으로 남하해 왔음에도 불구하고, 탐라국 사신이 제대로 찾아 올 수 있었다. 이 사실은 양국간의 교류가 활발하였고, 탐라국은 백제 조정의 동정을 정확히 읽고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문주왕이 탐라국왕도 아닌 그 사신에게 3품의 은솔 관등을 내려주었다. 이는 백제가 처한 당시의 궁색한 처지에서 비롯된 파격적인 벼슬이었다.
그 해 8월 해구(解仇)는 병관좌평에 임명되었다. 이듬해 2월에 문주왕은 궁실을 중수하여 국왕의 위>엄을 과시하고자 했다. 아울러, 아우인 곤지를 내신좌평에 임명하여 왕권의 후원세력을 든든하게 포진시킨 것이다. 그런데, 백제 조정의 실세였던 곤지는 그 해 7월에 사망했다. 그가 사망하기 2개월 전인 5월에 "흑룡이 웅진에 나타났다"는 <삼국사기>의 기사는, 곤지의 사망 그것도 피살을 암시하는 문구로 해석된다. 병관좌평 해구는 문주왕을 살해하기에 앞서 실세인 곤지를 먼저 제거하였을 개연성이 높다. 곤지는 문주왕이 피살되기 불과 2개월 전에 죽었기 때문이다(<삼국사기>에 의하면, 문주왕은 그 4년 9월에 사망한 것으로 되어 있지만, 3월 9월이 맞다).
해구는 지금의 서울 지역에서 백제를 건국하는데 큰 공을 세운 해씨 가문 출신이었다. 그 가문의 기원은 부여에 두고 있었는데, 백제 국왕의 배우자인 왕비를 배출했던 왕비족이기도 하였다. 그는 병권을 장악한 상황에서 실추된 부여씨 백제 왕실을 전복하고 국왕이 되고자 했던 것으로 보인다. 실제 문주왕을 살해한 후 해구는 "군국정사(軍國政事) 일체가 모두 좌평 해구에게 맡겨졌다"라고 했을 정도로 백제 조정의 실권을 거머쥐고 있었다
문주왕의 아들로서는 당시 13세 된 삼근(三斤)이 있었다. 과연 이러한 상황에서 삼근이 즉위하였을지는 지극히 의문이 된다. 문주왕을 살해한 이듬해 봄, 해군는 은솔 연신(燕信)과 함께 무리를 모아 가지고 대두성(大豆城;예산군 두촌:신양면)에 근거지를 두고 반란을 일으켰다고 한다. 백제 조정의 최강자였던 해구가 1개 성곽에 의존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조정내의 세력 다툼에서 밀린 결과로 볼 수 밖에는 없다. 그러면 해구 세력을 축출할 수 있는 세력은 누구였을까? 백제가 지금의 서울 지역에 도읍하고 있던 시절, 해씨 가문과 더불어 번갈아 왕비족이 되었던 진씨 가문이었다. 해구는 문주왕을 살해한 후 조정의 실권을 장악하였다. 왕이 없는 공위 기간이 펼쳐진 것이다.
그런데 진씨 가문이 해구의 전횡을 용납하지 않고 제동을 걸었다. 진씨 세력은 문주왕의 어린 아들 삼근을 옹립하였다. 이들은 전통적 권위를 지닌 부여씨 백제 왕실의 복원을 원했다. 그 결과, 해구 세력과 진씨 세력간에는 격렬한 정쟁이 벌어졌다. 해구에게는 연신과 같은 토착 기반을 가진 연씨 세력의 지원이 있었지만, 진씨 세력에게 밀려 대두성으로 쫓겨나고 만 것으로 보여진다. 그렇지만, 여전히 해구 세력은 강성하였다. 좌평 진남(眞男)은 군사 2천명을 이끌고 대두성을 공격했지만 패하고 말았다. 덕솔인 진로(眞老)가 정예 병력 5백 명을 이끌고 공격을 시도하여 해구를 잡아 죽였다. 연신은 대두성을 빠져나와 고구려로 달아났다. 연신의 처자들을 붙잡아 웅진의 저자에서 목을 베었다. 모반자에 대한 응징에는 연좌제가 어김없이 집행되는 것이다.
이러한 곡절을 겪은 후에 삼근왕은 즉위하게 되었다. 그러나 실권은 유약한 삼근왕에게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를 옹립해 주었고, 부여씨 백제 왕실을 지켜준 진남과 같은 진씨 귀족에게 집중되어 있었다. 그런데 <삼국사기>에는 삼근왕이 즉위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부왕을 살해한 해구를 제거하지 못하고 있다가, 해구가 대두성에서 반란을 일으키자 삼근왕이 진남에게 명하여 치게 한 것으로 되어 있다. 이것은 훗날 왕실의 입장에서 서술한 데 불과하다. 기실은 문주왕 사후 공위시대가 펼쳐졌고, 후계자 문제에 있어서 삼근왕을 옹립한 진씨 세력과 고구려에게 수도와 한강 유역을 빼앗겨 버린 무능한 부여씨 왕실을 대신하여 몸소 즉위하려는 해구 세력간에 펼쳐진 갈등관계 속에서 이해하는게 합리적이다. 이러한 이해강 없었기에 김부식은 다음과 같은 사론(史論)을 덧붙여 탄식하고 있다.
춘추의 논법에는 임금이 살해되었는데, 그 역적을 토벌하지 않는데 대하여 심각하게 책망하여 말하기를, "신하다운 신하가 없었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해구가
문주왕을 살해하였는데 그 아들 삼근이 왕위에 올라 그를 죽이지 못하였을 뿐 아니라, 도리어 그에게 국정을 맡겼다가 1개 성을 근거지로 삼아 반란을 일으킨 연후에야 2차례나 대병을 출동시켜
이겼다. 이른바 첫 가을 서리를 단속하지 않았다가 굳은 얼음에 부닥치게 되었고, 반짝거리는 불똥을 을 끄지 않았다가 큰 불을 일으키는 격이니 그 유래하는 바는 적은데서부터 커지는 것이다. 당나라
헌종(憲宗)이 살해되었을 때도 3대만에야 간신이 그 역적을 죽였거늘 하물며 바다 모퉁이에 있는 궁벽한 곳이며, 삼근과 같은 어린애에 대하여야 무슨 말할 나위가 있겠는가!
(<삼국사기> 권 26, 삼근왕(三斤王) 2년조).
삼근왕은 15세의 어린 나이에 세상을 떴다. 삼근왕의 사망 원인은 알려진 바 없지만, 연령상으로 볼 때 자연사일 가능성은 희박해진다. 그를 옹립해준 진씨 귀족들의 전횡 속에서 일종의 꼭두각시 역할만 하다가 사망하였음은 분명하다
백제 조정에서는 후사(後嗣) 문제가 논의되지 않을 수 없었다. 일단 15세로 사망한 삼근왕에게는 자식이 없었을 가능성이 높다. 설령 아들이 있었다하더라도 왕위에 오를 수 있는 연령이 아닌 유아(幼兒)일 가능성이 지극히 높은 것이다.
결국, 삼근왕의 후손으로는 즉위가 어렵게 되었다. 삼근왕의 아우가 있었는지는 알 길이 없지만, 문주왕의 아우인 곤지의 다섯 아들 가운데서 사마(斯麻: 무령왕)와 모대(牟大: 동성왕)가 물망에 올랐다.
당시, 사마는 18세의 소년으로서 국내에 체류하고 있었다. 사마는 급박하게 돌아간 정변의 순간들을 한 발짝 뒤에서 체험하였기에 죄다 목도하고 있었다. 반면, 모대는 나이가 어렸고 왜에 장시간 체류했던 관계로 국내 정정에는 어두웠다.
실권을 쥐고 있던 좌평 진남과 같은 진씨 귀족들은 두 사람 가운데 모대를 택하기로 하였다. 모대는 사마보다 나이가 어렸으므로 조종하기에 용이하였을 뿐만 아니라, 국내 사정에도 어두운 편이었다. 진씨 귀족들은 모대에게 낙점을 주었기에 왜 조정으로 연락하여 그의 귀국이 준비되었다.
동성왕은 생전의 이름을 모대라고 하였다. <일본서기>에는 그를 말다(末多)라고 하였다. 그는 문주왕의 아우인 곤지의 아들이었다. 동성왕은 곤지가 왜에 건너가서 출생한 아들로 짐작되는데, 삼근왕이 사망한 후 즉위하게 된다. 삼근왕이 사망했을 때, 그는 일본열도에 체류하고 있었다. 동성왕이 체류하고 있던 곳은 그의 아버지인 곤지를 제사지내는 신사인 아스카베 신사가 있는 가와치 아스카 일대였다. 그런데, 왕위 계승자로 결정이 되어 백제로 떠나려고 할 때, 왜왕이 내전으로 불러 동성왕을 격려했다고 한다. 이 때 동성왕을 가리켜 "나이는 어리나 총명하다(幼年聰明)"는 칭찬이 붙었다. 당시, 그의 연령을 ‘유년(幼年)’이라고 하였다. 479년에 동성왕을 유년이라고 하였다면, 적어도 15세 이하의 소년이었음을 알 수 있다.
왜에 체류하고 있던 소년의 왕위계승자가 백제로 건너오게 되었다. 이 왕족 소년이 즉위하게 된 배경은 복잡다기한 당시 백제 정정(政情)에 기인하였다. 모대 혹은 말다라는 이름의 동성왕은 지금의 북규슈 지역인 쓰쿠시의 병사 500명의 호위를 받으며 귀국하였다. 동성왕은 482년(동성왕 4)에 자신의 즉위에 결정적 공로를 세웠음이 분명한 진로를 병관좌평으로 임명하였다. 진로(眞老)는 수도와 지방의 병마권을 장악하게 되었는데, 백제 조정내에서 실질적인 최고 강자였음을 뜻한다. 동성왕의 즉위 초반인 482년(동성왕 4) 이전의 기록은 전하지 않지만 순탄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482년에는 말갈로 표기된 동예 세력이 변경을 습격하여 300여 호를 잡아가지고 간다든지, 한 길이 넘게 큰 눈이 내리기도 하였다.
동성왕은 사냥을 좋아했다. 그는 담력이 보통 사람보다 월등히 뛰어났을 뿐 아니라, 활을 잘 쏘아 백번 쏘면 백번 맞추는 신궁(神宮)이었다. 동성왕은 말갈이 습격한 적이 있는 한산성에 나가 사냥을 하면서 군사와 백성들을 위무하고 열흘만에 돌아왔다. 웅진 북쪽에서 사냥하다가 신록(神鹿)을 잡기도 하였다. 동성왕은 사냥을 통하여 산림과 원야(原野)에 대한 지배권을 하나하나 장악하면서 왕정의 물적 기반을 확대시켜 나갔다. 왕이 사냥한 장소는 더 이상 지방 호족의 영유지가 될 수는 없었던 것이다.
동성왕의 사냥은 다른 왕들에 비해 빈번한 편이었다. 그 자신이 숨을 거두게 된 원인이 사냥이었듯이 유별난 데가 있었다. 동성왕은 지금의 부여 지역인 사비 들판이나 우명곡(牛鳴谷) 또는 우두성(牛頭城)에서도 사냥을 하였다. 사비 들판에서 가장 많은 3차례의 사냥을 하였다. 그랬기에 혹자는 동성왕이 사비성 천도와 관련해서 사비 들판으로 자주 사냥한 것으로 추리하기도 한다. 과연 그럴까? 동성왕은 500년(동성왕 22)에는 우두성에서 사냥을 하였는데, 이곳은 486년(동성왕 8)에 성을 축조한 곳이었다. 만약, 동성왕이 우두성 일원에서 사냥을 한 후 성을 쌓았다면, 축성과 관련한 지세를 탐지할 목적의 사냥으로 해석하는 게 가능하다. 그러나, 그 반대였다. 이는 동성왕의 사냥 목적이 국가에서 축조한 우두성을 중심한 그 일원에 대한 지배권의 확인에 있었음을 뜻하는 것이다.
동성왕은 493년(동성왕 15)에 신라에 사신을 보내어 혼인을 청하였다. 신라의 소지 마립간은 이에 응하였다. 왕족인 이찬 바지의 딸을 동성왕에게 시집보낸 것이다. 동성왕은 신라 왕실을 처가로 하는 혼인동맹을 맺게 되었다. 그럼으로써, 자신의 대내적 위상을 높였다. 그러면, 동성왕은 무엇 때문에 신라의 왕녀와 혼인하게 된 것일까? 동성왕이 신라에 혼인을 요청한 시기는 재위 15년으로서, 20대 후반의 연령으로 추정된다. 이러한 연령의 동성왕이 혼인하지 않았다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성왕이 신라 왕녀와의 결혼을 시도한 데는 정치적인 의미가 강하였다.
전통적으로 백제 왕실의 처족인 왕비족은 해씨나 진씨였다. 동성왕이 즉위할 무렵에 권력을 장악한 세력은 진씨 귀족이었다. 그러므로 동성왕은 진씨 출신의 여자를 왕비로 삼았을 가능성이 지극히 높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성왕이 청년기를 벗어날 무렵에 신라 왕녀를 배우자로 구하였음은, 진씨 세력의 수중에서 벗어나 왕권을 강화시키려는 데 있었을 것이다. 동성왕은 또 혼인을 통해 신라왕의 결속을 강화시켜 당면한 고구려의 남진을 효과적으로 저지하고자 했다. 그럼으로써 덜어진 국력을 기반으로 당면 과제인 왕권강화를 시도하고자 한 것이다.
동성왕은 혼인동맹으로써 신라와 함께 고구려의 남진을 한층 효과적으로 막아 나갔다. 혼인동맹 이듬해인 494년(동성왕 16)에 고구려와 신라 군대가 살수(薩水: 괴산군 청천면 일대) 벌판에서 싸우다가 신라가 이기지 못하고, 견아성(犬牙城: 상주시 화북면 장암리 견훤산성)으로 퇴각하여 지키고 있었다. 그런데 산라 군대가 들어 간 견아성은 금새 고구려 군대에 포위되었다. 백제 동부 전선에서의 전황을 들은 동성왕은 즉각 군대 3천 명을 출병시켰다. 백제 군대는 견아성을 포위하고 있던 고구려 군대를 축출시켰던 것이다.
495년(동성왕 17)에 고구려 군대가 백제의 치양성(雉壤城)을 포위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동성왕은 신라에 사신을 보내어 지원을 요청하였다. 신라에서는 장군 덕지(德智)가 군대를 이끌고 지원해 오므로 고구려 군대가 물러갔던 것이다. 이처럼 백제와 신라의 동맹은 잘 운용되고 있었다. 그러나 동성왕에게는 용의주도한 일면이 엿보인다. 동성왕은 탄현(炭峴)에 목책을 설치하여 신라의 침공에 대비했기 때문이다. 탄현은 대전시 동구와 옥천군 군서면에 소재한 식장산이라는 산에 소재한 고개로서 천험의 요충지였다. 요컨대, 동성왕은 국제관계의 현실을 누구보다 잘 꿰뚫고 있던 군주로서, 권력의 속성에도 밝았음을 생각하게 한다.
동성왕대에는 다양한 귀족세력들이 중앙 정계에 진출하고 있다. 진로(眞老:병관좌평), 사약사(沙若思:내법좌평), 백가(위사좌평) 및 연돌(燕突:병관좌평)과 같은 이들이 중앙의 요직에 임명되었다. 특정 귀족의 독주에서 벗어나 다양한 세력들이 등장하고 있었다. 동성왕은 백제 왕실에 도전하였던 해씨 세력의 요직 진출을 철저하게 봉쇄하였을 분 아니라, 자신을 옹립하였던 진씨 귀족세력의 권력 독주 또한 허용하지 않았다. 백제가 지금의 서울 지역에 도읍하고 있던 시기에는 왕실을 축으로 한 양대(兩大) 귀족 세력이었던 진씨와 해씨 외에는 요직에 기용되지 않았다. 그러나 동성왕대에는 사씨를 비롯하여 백씨, 연씨 등 금강을 중심으로 한 충청남도 지역에 기반을 가지고 있던 세력이 대거 등용되었다. 이러한 현상은 동성왕이 특정 귀족의 권력 독주를 막기 위해 여러 세력을 기용한 것으로서, 귀족들간의 상호 견제와 대립을 통해 왕권을 강화시키려고 한 조치였다.
동성왕은 486년(동성왕 8)에 이르러 국왕의 내적 권력을 공고하게 마련했다. 동성왕은 위사좌평에 백가를 임명하였다. 백가는 지금의 공주 지역의 토호(土豪)로 추정되고 있다. 금강을 백강이라 불렀는데, 그 백강의 ‘백’과 인연 깊은 씨성으로 추정되는 백씨였다. 동성왕은 공주 땅의 토호 세력을 측근 요직에 배치함으로써 든든한 황실의 배후 세력을 얻게 되었다. 그리고 남제에 사신을 파견하여 국왕의 지위에 대한 국제적인 공인을 확보하는 동시에 궁실을 중수하여 왕실의 위엄을 과시하였다. 동성왕은 그 해 10월, 궁성 남쪽에서 크게 군대를 사열하였는데, 군 통수권의 확립을 의미하는 것이다. 동시에 원정(遠征) 전야의 어떤 검열을 생각하게 한다.
이와 관련 있는 게 488년(동성왕 10)의 기록이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위나라에서 군대를 보내어 와서 정벌하였으나 우리에게 패하였다"라는 기사가 되겠다. 이 기사는 <자치통감> ‘영명(永明) 6년조’의 "위나라가 군대를 보내어 백제를 쳤으나 백제에게 패하였다"라는 구절을 옮겨 온 것이다. 북중국의 왕조인 북위에서 백제를 침공했으나, 패하였다는 내용이 되겠다. 고정 관념을 뛰어넘는 선뜻 믿기지 않는 기사이다. 유목민 출신인 선비족 계통의 북위가 과연 위험한 항해를 무릅쓰고 백제를 침공할 필요가 있었을까에 대해서는 조선시대 이래로 수긍하기 어렵다는 게 대세였다. 혹은, 백제의 요서진출과 관련하여 이 문구를 해석하기도 하였다. 그런데 이와 관련된 전쟁으로 보이는 기사가 <남제서(南齊書)>에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이 해에 위나라 오랑캐가 또다시 기병(騎兵) 수 십만을 동원하여 백제를 공격하여 그 지경(地境)에 들어가니 모대(牟大)가 장군 사법명(沙法名) 찬수류(贊首流) 해례곤(解禮昆) 목간나(木干那)를 파견하여 무리를 거느리고 오랑캐 군대를 기습 공격하여, 그들을 크게 무찔렀다.
건무(建武) 2년(495년:동성왕 17)에 모대가 사신을 보내어 표문을 올려 말하기를 "지난 경오년(庚午年:490년)에 험윤이 잘못을 뉘우치지 않고 군사를 일으켜 깊숙이 쳐들어 왔습니다. 신(臣)이 사법명(沙法名) 등을 파견하여 군사를 거느리고 역습케 하여 밤에 번개처럼 기습 공격하니, 흉리(匈梨)가 당황하여 마치 바닷물이 들끓듯 붕괴되었습니다. 이 기회를 타서 쫓아가 베니 시체가 들을 붉게 했습니다. 이로 말미암아, 그 예리한 기세가 꺾이어 고래처럼 사납던 것이 그 흉포함을 감추었습니다.
지금 천하가 조용해진 것은 실상 사법명 등의 꾀이오니 그 공훈을 찾아 마땅히 표창해 주어야 할 것입니다. 이제 사법명을 임시로 정로장군(征虜將軍) 매라왕(邁羅王)으로, 찬수류를 임시로 안국장군(安國將軍) 벽중왕(陽中王)으로, 해례곤을 임시로 무위장군(武威將軍) 불중후(弗中侯)로 삼고, 목간나는 과거에 군공(軍功)이 있는 데다가 또 대(臺)와 큰 선박을 때려 부수었으므로, 임시로 광위장군(廣威將軍) 면중후(面中侯)로 삼았습니다. 엎드려 바라옵건데 천은(天恩)을 베푸시어 특별히 관작을 제수하여 주십시오" 라고 하였다.(<남제서>권 58, ‘백제국조’).
위의 전쟁 기사는 과거부터 논란이 많았다. 백제가 북위와 적대 관계인 남제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조작한 허구저인 전쟁으로 보는 견해도 있었다. 그러나 외교문서에 그것도 존재하지도 않았던 전쟁을 꾸며 넣었을 가능성은 희박하다. 따라서 이 전쟁은 사실로 보아야만 한다. 그렇다고 할 때, 490년에 백제 수군은 험윤 혹은 흉리로 표기된 북위의 선단을 크게 격파하였음을 알게 된다. 물론, 이 전쟁은 <삼국사기> 에는 전혀 비치치 않지만, 488년에 북위 군대를 격파한 기사가 보이므로, 양자는 동일한 전쟁으로 간주할 수도 있다. "목간나는 과거에 군공이 있다"라고 하였는데, 이 군공 또한 북위와의 전쟁과 관련있음이 분명하므로 488년의 전쟁을 가리킨다고 보아 무방하다. 바로 건무 2년조 앞의 ‘이 해’로부터 시작되는 전쟁 기사가 488년의 전쟁을 뜻한다고 보겠다. 요컨대, 백제는 적어도 488년과 490년의 두 차례에 걸친 북위와의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음을 알 수 있다. 488년은 육상전을, 490년에는 해전을 하였던 것이다.
그러면, 이 전쟁을 승리로 이끈 백제 장군들이 남제로부터 받은 관작을 보자. 사법명부터 목간나에 이르기까지 4명의 백제 장군들은 남제의 장군호를 제수 받게 된다. 이들은 장군호에 이어 어김없이 왕이나 후(侯)로 봉해지는데, 왕과 후 앞에는 지명을 관칭(冠稱)하고 있다. 그런데 이들 지명은 중국 역대 지명 사전에 전혀 보이지 않으므로, 중국 대륙에서 그 위치를 구하기는 어렵다. 오히려, 백제 영역 내에서 찾기 쉬운데, 지명을 관칭한 왕후는 <남제서> ‘백제국조’에 다음과 같이 보인다.
공(功)에 대하여 보답하고 부지런히 힘쓴 것을 위로하는 일은 실로 그 명성과 공업을 보존시키는 것입니다. 임시로 부여한 영삭장군 신(臣) 저근(姐瑾) 등 4인은 충성과 힘을 다하여 나라의 환란을 쓸어 없앴으니 그 뜻의 굳셈과 과감함이 명장(名將)의 등급에 들만하며, 나라의 간성(干城)이요 사직의 튼튼한 울타리라 할 만 합니다. 그들의 노고를 헤아리고 공을 논하면, 환히 드러나는 지위에 있어야 마땅하므로, 지금 전례에 따라 외람되이 임시 관직을 주었습니다. 엎드려 바라옵건대, 은혜를 베푸시어 임시로 내린 관직을 정식으로 인정하여 주십시오. 영삭장군 면중왕 저근은 정치를 두루 잘 보좌하였고, 무공 또한 뛰어났으니, 이제 임시로 관군장군(冠軍將軍) 도장군(都將軍) 도한왕(都漢王)이라 하였고, 건위장군(建威將軍) 팔중후(八中侯) 여고(餘古)는 젊었을 때부터 임금을 도와 충성과 공로가 진작 드러났으므로, 이제 임시로 영삭장군 아착왕(阿錯王)이라 하였고, 건위장군 여력(餘歷)은 천성이 충성되고 정성스러워 문무가 함께 두드러졌으므로, 이제 임시로 용양장군 매로왕(邁盧王)이라 하였으며, 광무장군(廣武將軍) 여고(餘固)는 정치에 공로가 있고 국정을 빛내고 드날렸으므로, 이제 임시로 건위장군 불사후(弗斯侯)라 하였습니다.(<남제서>권 58. 백제국조).
위의 기록들을 모두 놓고 볼 때, 왕과 후에 관칭된 면중·도한·팔중·아착·매로·불사·매라·벽중·불중 등이 지명임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지명은 중국 지명이라기보다는 대부분 백제 지역으로 비정되고 있다. 가령, 면중은 전라남도 광주로, 도한은 전라남도 고흥이나 나주 지방으로, 팔중은 전라남도 나주 일원으로, 아착은 전라남도 여수로, 매로는 전라북도 옥구나 전라남도 보성 혹은 장흥 일원으로, 불사는 전라북도 전주로, 벽중은 전라북도 김제로 각각 비정되어진다. 이러한 비정이 정곡을 찔렀다고 단언할 수는 없지만, 일단 중국 대륙에서는 찾기 힘든 지명일 뿐 아니라, 백제적인 색체가 강하다는 특징을 지니고 있다. 일례로 아착왕의 ‘아착’과 관련하여 <삼국사기> ‘지리지’에는 "아착현(阿錯懸)은 본래 원촌현(猿村懸)이다"고 하였는데, ‘원촌’은 지금의 여수 일대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들 지명은 대략 전라북도 일부와 전라남도일원에 몰려 있다는 지명 분포의 경향성을 띠고 있다. 그러므로 지명을 관칭한 왕과 후들은 북위와의 전공이나 국왕을 잘 보좌한 공로로 중국의 장군호를 받는 동시에, 백제가 새로 개척한 영산강유역의 각 지역에 봉해지고 있다고 보겠다. 백제는 근초고왕대의 마한경략을 통해 지금의 노령산맥 이북선까지만 영역화하였다.
아울러, 이 기록을 통해서 저근은 면중왕에서 도한왕으로, 여고는 팔중후에서 아착왕으로 전봉(轉封)되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그리고 495년에는 목간나가 면중후에 봉해지고 있다. 이러한 사실은 동성왕대의 귀족들은 전공 등에 따라 임지를 바꾸어 계속 이동하면서 지방을 통치했음을 알려준다. 이는 지방을 통치하는 주체가 토착 호족이 아니라 중앙에서 파견한 귀족이었음과 더불어, 전봉은 이들의 토착화를 차단하기 위한 조처로 판단된다. 나아가, 동성왕 휘하에 왕과 후, 그리고 태수들이 포진하고 있었음은, 동성왕 또한 왕 중 왕인 대왕의 위치에 군림하였음을 뜻한다고 보겠다.
왕후를 칭한 귀족들은 구체적으로 저근·여고·여력·여고·사법명·찬수류·해례곤·목간나가 되겠다. 이 중 북위와의 전쟁에서 군공을 세운 사법명·찬수류·해례곤·목간나를 제외한 그 앞의 4명은 저근만 제외하고는 부여씨 왕족이다. 저근은 문주왕을 도와 목례만치와 함께 웅진청도에 공을 세운 조미걸취(祖彌桀取)의 조미씨와의 관련을 연상시킨다. 부여씨를 여씨로만 표기한 것처럼, 복성(複姓)인 조미씨를 단성(單性)인 저씨로만 표기한 것으로 볼 수도 있다. 물론, 조미씨를 유력 성씨인 진모씨(眞慕氏)로 파악하는 견해도 있다. 여하간 저근은 "절부(節符)와 부월(斧鉞)을 받아 모든 변방을 평정하였습니다"라고 한 기사에 이어 저근이 다시금 언급되고 있는 만큼, 지방세력에 대한 통제와 흡수 그리고 영산강 유역으로의 진출에 공을 세운 인물이었음을 생각하게 한다. 그리고, 저근은 면중에 왕으로 파견된데 반해, 목간나는 후로서 이곳에 부임하게 된다. 이로써 볼 때, 왕과 후들이 특정 지역에 파견되면, 그 지역 이름을 취해서 왕이나 후를 칭하는 것이지 왕과 그 밑의 후가 함께 면중 지역으로 파견되었다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그러나 면중의 위치가 지금의 광주광역시가 맞다면 큰 도회였던 만큼, 그 격에 맞게끔 왕과 그 밑의 후가 함께 파견되었을 가능성도 배제하기는 어렵다. 어쩌면, 이 가능성이 더 큰지도 모른다.
동성왕은 한성함락이라는 일대 사변과 웅진천도 초기의 내분과 같은 정정의 혼란을 틈타 이탈해 간 세력들을 하나하나 장악해 가야만 했다. 동성왕이 즉위하는 해인 479년에 가라국왕(加羅國王) 하지(荷知)가 보낸 사신은 남제에 도착하였다. 하지는 이 때 남제로부터 보국장군 본국왕(輔國將軍本國王)을 제수받았다. 하지는 가야제국 가운데 고령에 소재한 대가야의 국왕으로 간주되어진다. 그는 근초고왕 이래 백제에 예속되어 있던 가야세력이 백제의 영향력 약화를 틈타 남제로부터 자신의 정치적인 지위를 인정받고자 한 것이다. 동성왕이 해결해야 될 문제가 가야제국에 대한 영향력 복원이었다. 또, 그에 앞서 지방 세력에 대한 장악이 급선무였다.
동성왕은 500년(동성왕 22) 봄에 궁성 동쪽에 높이가 다섯 길이나 되는 임류각(臨流閣)이라는 장대한 누각을 세웠다. 또, 못을 파고 진기한 새들을 길렀다. 금강을 굽어 볼 수 있는 경관 수려한 자리에 세워진 누각이 임류각이었다. 그러나 사치스런 이러한 토목공사에 반대하는 귀족들이 적지 않았다. 흉년으로 인한 주민의 이탈과 전염병의 창궐로 민심이 뒤숭숭한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동성왕은 귀족들이 항의하였지만 대꾸도 하지 않았을 정도로 무시하였다. 동성왕은 다시 간(諫)하는 자가 있을까 봐, 궁성문을 닫아 걸기까지 하였다. 그 해 5월, 동성왕은 가뭄으로 농민들이 하늘만 쳐다보며 애를 태우는데도 아랑곳없이 측근들을 거느리고 잔치를 베풀어 놓고 밤새 마음껏 즐겼다. 바로 임류각에서였다. 이러한 사실은 동성왕이 강력한 전제왕권을 확립했음을 뜻한다.
이듬해인 501년(동성왕 23년) 정월부터 괴이한 일이 일어났다. 도성 안에 거주하는 노파가 여우로 변하여 사라지는 사건이 발생했다. 남산에서는 두 마리의 호랑이가 싸웠는데 놓치고 말았다. 불길한 일에 대한 암시임은 분명하였다. 그 해도 서리가 내려 보리를 해친다거나 5월부터 가을까지 비가 내리지 않아 농사에 먹구름이 끼였다. 8월에는 지금의 부여군 임천면에 가림성을 축조하고는 위사 좌평 백가로 하여금 지키게 하였다.
동성왕은 501년 10월에는 사비성 동족 벌판에서 사냥을 하였고, 11월에는 지금의 금강인 웅천 북쪽 벌판과 사비성 서쪽 벌판에서 각각 사냥을 하였다. 동성왕이 사비성 벌판에서 사냥을 자주 행한 이유는 도성에서 가깝다는 이유 외에 천도지의 물색과 결부지어 해석하기도 한다. 그러나, 동성왕이 10월에서 11월에 걸쳐 집중적으로 사냥을 한 배경은 군사권에 대한 통제와 무관하지 않은 것으로 해석된다. 동성왕은 흉년과 토목공사로 인한 하층 주민들의 이탈 현상과 더불어 동성왕의 전횡을 말렸던데서 알 수 있듯이 귀족층의 불만을 감지하고 있었다. 모반의 가능성을 예견하였기에 동성왕은 도성으로의 진격이 용이한 그 외곽 부대에 대한 검열적 성격을 띤 사냥을 거듭 실시한 것으로 짐작된다. 특히, 동성왕은 병을 핑계로 가림성으로의 전출을 원하지 않았던 백가를 유의하였을 것 같다. 그는 백가의 원망을 포착하였을 가능성이 높다. 이런 이유로 동성왕은 사비성 벌판의 동쪽과 서쪽에서 사냥을 통하여 그곳 지방관들과 그 관할 부대에 대한 지배권을 확인하려고 한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동성왕의 의도와는 달리 예기치 않은 일이 발생했다. 동성왕은 사비성 서쪽 벌판에서 사냥을 하다가 큰 눈에 길이 막혀 마포촌(馬浦村)에 묵었다. 이 때, 사냥 구역에 소재한 현지의 지방관인 가림성주 백가 또한 동성왕을 수종하였을 가능성이 높다. 원한을 품고 있던 백가는 이 틈을 절대 놓치지 않았다. 자객을 보내 유숙하고 있던 동성왕을 칼로 찔렀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12월에 이르러 돌아가셨다"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동성왕은 현장에서 사망하지 않고, 부상을 입은 채 웅진성으로 돌아 온 후 사망하였던 것이다.
동성왕은 사냥나갔다가 칼에 찔려 혼수상태에 빠졌다. 이 때, 백제 조정은 일단 동성왕을 찌른 사람이 누군가하는 문제와 동성왕의 소생 여부에 온 신경을 쏟았을 것이다. 그 다음에는 백가의 단독 소행인가 아니면, 동범자가 있는가 여부에 촉각을 곤두세웠으리라 본다. 이 문제에 관한 실마리는 "정월에 좌평 백가가 가림성에서 웅거하여 반란을 일으켰다"라는 기사가 되겠다. 동성왕이 칼에 찔린지 2개월 가까이 흘러 백가가 반란을 일으킨 것이 된다. 동성왕이 칼에 찔린 후, 백가는 즉각 체포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사실은 동성왕의 피살이 귀족들의 분노를 야기시켰다기 보다는 서로 간의 이해득실에 따라 저울질하는 상황이었음을 뜻한다.
이와 관련해, <일본서기>에 인용된 백제측 문헌인 <백제신찬>에 의하면, 동성왕의 피살을 "백제 말다왕이 포학무도하여 국인(國人)이 공히 제거하였다"라고 하였다. 백가에 의한 살해가 아니라, 국인으로 말해지는 범 귀족세력에 의해 제거되었음을 뜻한다. 다른 문헌도 아니고, 백제 당시에 편찬된 책으로 믿어지는 <백제신찬>의 기록인 만큼 각별히 유의할 필요가 있다. 이 문헌에 의미를 둔다면 큰 부상을 입고 누워 있던 동성왕이 치료를 받기보다는 방치된채 사망하였다면, "국인에 의해 공히 제거"가 되는 것이다.
귀족들은 쓰러진 동성왕이 소생하기를 바라지 않았던 것 같다. 엄혹한 동성왕보다는 넉넉한 인품의 군왕 후보를 물색하였을 것이다. 그러는 가운데 동성왕이 세상을 뜨자, 그 이복형인 사마가 새로운 국왕으로 추대되었다. 동성왕을 살해하여 사마 곧 무령왕을 최대의 수혜자로 만들어 준 이가 백가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반란을 일으킨 배경은 알려진 바 없다. 다만, 정황에 비추어 다음과 같이 추측을 해 본다. 백가는 ‘포악한’ 동성왕을 살해하는데 일등 공신이었지만, 동성왕을 방치시켜
제25대 무령왕은 웅진도읍기(475~538)에 백제 중흥에 진력한 영주로서 알려진 바 있다. 그러나 그가 백제 역사에서 자리매김을 제대로 받게 된 데는 1971년 여름 공주 송산리 백제 고분군 지역에서 그 5호분과 6호분의 배수로 시설 공사 중 실로 우연하게 그 능이 발견됨에 따라 재조명을 받게 된 때문이었다.
108종 2,906점의 유물이 발견되어 백제 최고급 문화의 찬연함을 보여주었다. 그런데, 가장 값진 유물은 무령왕과 그 왕비의 묘터를 토지신으로부터 구입했음을 밝혀주는 문권(文券)인 매지권(買地券)이었다.
매지권에는 무령왕인 ‘영동대장군 백제 사마왕(寧東大將軍百濟斯麻王)’ 이 계묘년(癸卯年) 5월에 62세로 사망하였음을 밝혀주고 있다. 이로써 무령왕의 계보를 밝힐 수 있는 단서를 얻었다. 또, 정치적 급변기였던 웅진시대의 왕위계승을 둘러싼 정치적 권력구조와 그 추이에 관한 보다 정확한 지견을 얻을 수 있었다.
‘무령왕릉 매지권’은 무령왕의 계보에 관한 언급은 없으나, 523년에 그가 62세로 사망한 것으로 되어 있다. 이를 토대로 할 때, 그는 462년에 출생하여 40세인 501년에 즉위하였음을 알려준다. 그런데 무령왕의 계보에 관해서는 몇 가지 이설이 제기되었다. 우선, 한성말기에서 웅진도읍기에 이르는 <삼국사기> ‘백제본기’ 본문의 왕계에 문제가 드러난다. 이와 관련해, 다음과 같은 사실을 확정해 본다. 19대 구이신왕은 405년에 출생하여 427년에 사망한 것으로 밝혀졌다. 23대 삼근왕은 465년에 출생하여 479년에 사망하였다. 25대 무령왕은 ‘무령왕릉 매지권’을 통하여 462년에 출생하여 523년에 사망한 것으로 밝혀졌다.
개로왕의 아우인 문주왕은 신라에 파견되어 1만명의 구원군을 이끌고 왔으나, 이미 파국(破局)을 맞은 후였다. 그러한 상황에서 문주왕은 즉위하였지만, 난세(亂世)의 군주로는 적합하지 않은 우유부단한 성품이었다. 물론, 문주왕은 백성들을 사랑하고 또 사랑받는 군주였지만, 비상시국을 냉혹한 의지로 극복할 수 있는 임금은 되지 못하였다.
그렇다고 할 때, 19대 구이신왕과 25대 무령왕까지의 5세대 사이에 즉위한 국왕들의 출생연령을 놓고 볼 때, 57년이 소요되었고, 각 왕들은 세대 평균 11년마다 즉위 국왕들을 출생시킨 격이 된다. 이러한 숫치는 매 국왕들간의 연령차가 고구려나 신라의 경우 27~31세 정도인 점과는 현저한 차이를 보이고 있다. 가령, 구이신왕과 그의 고손자인 삼근왕 사이에 2세대 차이인 60년밖에 연령 차이가 나지 않고 있을 뿐이다. 이는 말할 나위 없이 <삼국사기> ‘백제본기’ 본문의 왕계에 문제점이 도사리고 있음을 느끼게 한다. 이러한 점을 염두에 두면서 무령왕의 계보를 살펴 볼 필요가 있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는 무령왕을 모두 동성왕의 둘째 아들로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일본서기> ‘웅략 5년(461)조’에 따르면, 무령왕은 곤지(昆支)의 아들이지만, 기실은 개로왕의 아들인 것처럼 서술하였다. 즉, 개로왕은 아우인 곤지를 왜(倭)에 사신으로 보낼 때, 곤지의 간청에 따라 자신의 임신한 부인(부인은 삼국시대 왕비에 대한 호칭임)을 곤지의 아내로 삼아 보냈다고 한다. 그런데 임신한 부인이 산기를 느끼자 지금의 후꾸오까 북쪽의 가카리시마라는 섬에 정박하여 몸을 풀어 무령왕을 출산했다. 이로써, 무령왕의 이름이 ‘섬왕(도왕[島王])’, 즉 ‘사마왕(斯麻王)’이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다고 하였다. 그랬기에, 백제인들이 왜로 항진할 때, 지나치는 가카라시마를 일컬어 니리무세마라고 하였는데 ‘임금의 섬’이라는 뜻이다.
<일본서기>에 적혀 있는 형제공처설화(兄弟共妻說話)는 곤지가 왜로 건너간 시기나, 무령왕의 출생 연대와 그 출생 장소에 관해서는 수긍되는 바 있다. 무령왕의 출생 연령이 ‘무령왕릉 매지권’과 비교할 때, 1년 차이 밖에 없기 때문이요, 그가 출생하였다는 가카라시마는 이키시마와 후쿠오카현 북쪽 해안에 소재한 가라츠 시를 직선거리로 잇는 바다 위에 소재한 가카라시마로 비정되는데, 한국에서 건너온 여인이 허리띠를 풀고 아이를 낳았다는 전설이 남아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형제공처 설화는 형사취수제도 아니요 전례가 없을 정도로 너무나 내용이 모욕적이고 괴기하여 따르기 어렵다. 다만, 이 설화가 지닌 의미는 존중해야 될 것 같다. 아마도 무령왕의 혈통을 한성도읍기의 마지막 왕으로서 대단한 권위를 지니고 있었지만, 직계 혈통이 단절된 개로왕과 연결시킴으로써, 여러 차례의 정변을 거친 후 연만한 나이에 즉위한 무령왕의 왕위 계승을 정당화하려는 의도가 숨어 있는 것이라고 하겠다.
그러나 이와는 달리 <일본서기>에 인용된 <백제신찬>에는 무령왕을 개로왕의 아우인 곤지의 아들로 기록하였다. 이 기록에 의하면, 무령왕은 동서왕의 이복형이 되는데, 여러 가지 논증을 통해 볼 때 타당함이 입증되고 있다. 한가지 예를 든다면, 479년 왜에서 귀국하여 즉위하는 동성왕의 연령을 ‘유년(幼年)’이라고 하였으므로, 유년의 상한 연령인 15세를 기준으로 할 때, 적어도 그는 465년 이후에 출생한 게 된다. 이는 462년에 출생한 무령왕보다 적어도 동성왕이 3세정도 연령이 더 어렸음과 더불어, <백제신찬>에 기록된 무령왕의 계보가 타당함을 알려주고 있다. 요컨대, 무령왕은 곤지의 아들로서 동성왕의 형이었지만, 동성왕의 사망 후인 40세의 나이로 즉위한 것이다.
<신찬성씨록>에 수록된 가와치아스카베노 미야스코의 선조(先祖)와 아스카베 신사의 제신(祭神)이 곤지인 점에서도 이 점은 입증되고 있다. 아스카베신사를 중심한 가와치 아스카베노 고오리 일대에는 백제계의 횡구식 석곽분이 분포하였다. 곤지는 이처럼 일본열도에 구축한 세력 기반과 대왜교역을 통해 경제적인 부를 착실히 구축해 나갔다. 이러한 기반을 바탕으로 뒷날 곤지계인 동성왕과 무령왕이 즉위할 수 있었다고 하겠다. 그런데, 475년 백제는 고구려의 침공을 받아 한성이 함락되고 웅진성으로 천도하는 국가적인 일대 시련을 겪게 되었다. 이에 곤지는 급거 귀국하여 내신좌평에 임명되어 왕권의 회복에 전력을 기울였다. 그러나 그는 웅진도읍 초기 왕권의 약화와 정국의 불안정에 편승해서 왕위를 넘보던 병관좌평 해구에게 피살된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즉위와 관련된 무령왕의 당면 현안은 자신의 집권과 직접 관련된 백가의 난에 대한 진압이었다. 무령왕은 직접 군대를 거느리고 낙 우두성에 주둔하였다. 우두성은 486년에 동성왕이 축조한 성이자 이곳에서 사냥을 하였던 곳이다. 그 위치는 알려진 바 없지만, 부여군 임천면에 소재한 가림성을 공격하기 위한 군대가 머물렀던 곳이다. 따라서 우두성은 대략 지금의 공주에서 임천면을 잇는 구간에 소재한 것으로 보인다. 무령왕은 한솔인 해명(解明)에게 명하여 가림성을 공격하게 했다. 백가를 토벌하는데 해씨 세력이 무령왕의 편에 섰음을 알려준다. 여기서 해명은 무령왕이 출정할 때부터 종군한 인물이었는지 아니면, 우두성의 성주였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해명의 공격을 받고 백가는 성문을 열고 나와 항복하였다. 무령왕은 백가의 목을 베고는 그 시신을 백강(白江)에 던져버렸다. 시신을 강물에 던져버린 것은 매장권(埋葬權)을 박탈한 가혹한 형벌이었다. 모반자들에게는 이러한 형벌이 어김없이 가해졌다.
무려왕은 백가의 반란을 진압하였다. 그럼으로써 동성왕 사후의 뒤처리를 마무리짓고, 즉위 기반을 다질 수 있었다. <삼국사기> 에서 무령왕을 가리켜 "신장이 8척이요 얼굴이 그림과 같았으며, 인자하고 너그러웠으므로, 민심이 귀부(歸附)하였다"라는 평을 내렸다. 무령왕이 폭넓은 지지 기반을 가졌음과 더부어 동성왕과는 확연히 구분되는 정치 스타일의 소유자였음을 알려준다. 주민들이 굶주려서 서로 잡아먹는 상황인지라, 신하들이 창고를 열어 구제하자고 하였지만, 동성왕은 거절하였다. 그러나 무령왕은 주민들이 굶주리자 즉각 창고를 열어 구제해 주었다.
백제가 망하다시피 한 상황을 몸소 체험했던 무령왕은 무엇보다도 군사력 배양과 실지 회복에 비상하게 힘을 쏟았다. 502년(무령왕 2)에는 군대를 출동시켜 고구려의 남쪽 변경을 침공하였다. 그 이듬해에는 5,000명의 군대를 출병시켜 마수책(馬首柵)을 불태워 버리고, 고목성(高木城)으로 침입해 오는 말갈 군대를 쳐서 물리쳤다. 무령왕은 고구려의 부용세력인 말갈의 침공에 단단히 대비했다. 507년(무령왕 7)에는 그 전해에 말갈 군대가 성을 깨뜨리고 주민 600여 명을 죽이고 사로잡아갔던 고목성 남쪽에 2개의 목책을 세우는 동시에 장령성(長嶺城)을 축조하였다. 무령왕은 고구려의 보용 세력인 말갈의 침공에 단단히 대비하였던 것이다. 그 해 10월에 고구려 장군 고로(高老)가 말갈과 모의하여 한성을 치기위해 횡악 아래에 주둔하고 있었다. 무령왕은 즉시 군대를 출동시켜 고구려와 말갈 연합군을 일거에 격파시켰다.
무령왕은 고구려의 침공과 약탈에 대해서는 철저한 보복으로 일관했다. 512년(무령왕 12)에는 고구려 군대가 가불성(加弗城)을 습격하여 점령하고는 군대를 옮기어 원산성(圓山城)을 쳐서 깨뜨리고는 죽이고 약탈한 것이 심히 많았다. 무령왕은 직접 정예한 기병 3천 명을 거느리고 위천(葦川)의 북쪽에서 싸웠는데, 고구려 군대는 무령왕의 군대가 적은 것을 보고는 가볍게 여겨 진(陣)을 치지 않았다. 무령왕은 이 틈을 놓치지 않고 갑자기 군대를 이끌고 내쳐서 크게 격파하였다. 이러한 거듭된 전승에 힘입어 무령왕은 양나라에 보낸 외교 문서에 "여러 차례 고구려를 깨뜨렸다"라고 밝혔고 "다시금 강한 나라가 되었다"라는 평을 얻게 되었다. 무령왕은 고구려에 대한 설욕을 하였던 것이다.
512년에 백제는 이른바 임나 4현(縣)인 상다리·하다리·사타·모루를 점령하였다. 이들 지역은 일반적으로 섬진강의 동편에 소재한 지역으로 비정된다. 따라서 백제의 군사적 영향력이 가야제국에 미치기 시작하여 그 영토를 확대시킨 것이다.
무령왕은 한편 중국 남조의 양나라와 그리고 일본열도의 왜와의 관계를 긴밀히 하였다. 백제의 입장으로 볼 때, 양나라는 선진 문물의 섭취 창구로써, 또 국왕의 위상 확립에 있어서 긴요한 대상이었다. 무령왕은 역대 백제왕들이 받아 왔던 진동장군보다 등급이 높은 영동대장군을 제수 받았다. 반면, 왜에는 오경박사 단양이(段楊爾)에 이어 고안무(高安茂)를 파견하는 등, 문화 사절의 파견에 소홀하지 않았다.
무령왕은 간난(艱難)의 길을 걸었던 백제의 정치 상황을 거울삼아 사회안정을 추구해 갔다. 무령왕은 권력기반을 강화하는 동시에 사회안정화를 위한 시책을 추진한 결과, 주민들의 지지를 받아 그에 대하여 "인자관후하여 민심이 귀부하였다"라는 호의적인 평을 남기게 되었다고 해석된다. 또 그렇기 때문에, 백제의 중흥의 ‘대왕(大王)’으로서의 의미가 함축된 ‘무령(武寧)’이라는 시호를 받았을 것이다.
무령왕의 아들로서 즉위한 성왕은 그의 이름에 걸맞는 빼어난 업적을 남겼다. 회복된 국력을 바탕으로 국호를 ‘남부여(南扶餘)’로 고침으로써 부여에서 이어지는 역사적 법통을 분명히 밝히는 한편, 고구려와의 대등한 자세를 확고히 하였다. 이와 더불어, 성왕은 538년(성왕 16)에 도읍을 협착한 웅진성에서 비교적 넓은 평야를 끼고 있는 사비성(부여)으로 천도하여, 원대한 국가경영의 토대를 마련했다. 부정적인 측면에서 볼 때, 웅진성이라는 도읍은 음모와 내분의 땅이었다. 2명의 국왕이 피살되고 반란으로 점철되어지는 등 칙칙한 그늘이 짙게 드리워진 도시였다. 성왕 일 개인의 입장에서 볼 때, 웅진성은 탈출하고 싶은 곳일지언정 애정을 가질만한 곳은 전혀 아니었다. 성왕은 부여적인 전통을 계승하여 내분을 종식시키고, 국정의 분위기를 일대 쇄신하고자 했다. 이러한 성왕의 의지는 국호의 교체와 사비천도로 구현되었다.
그런데, 천도는 일조일석에 이루어지는게 아닌 만큼, 오랜 기간에 걸쳐 준비가 이루어진 것으로 보아야만 한다. 이와 관련해, 부소산성 동문터 주변에서 ‘대통(大通)’ 명문의 와편이 출토된 바 있다는 사실을 환기시키지 않을 수 없다. 이 사실은 대통연간(527~528) 무렵에 부소산성이 축조되었음을 알려준다. 부소산성의 축조는 천도지로서의 사비성 경영이라는 차원에서 이루어졌던 것으로 보인다. 성왕은 이러한 사비천도와 짝하여 지방에는 방(方)-군(郡)-성(城)체제를 시행하여 전면적인 지방지배를 단행했다. 그리고 16관등제의 정비와 더불어, 국왕을 축으로 하는 효율적인 국정 운영을 위해 22개의 관서(官署)를 설치하였다. 이 관서 이름 가운데는 <주례(周禮)>에 등장하는 명칭이 다수 보이므로, 중국 고관제(古官制)의 영향을 받았던 것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성왕 또한 양나라의 문물 수용에 적극적이었다. 534년(성왕 12)과 541년(성왕 19)에 거푸 양나라에 사신을 파견하여 <열반경>에 대한 의소(義疏)와 모시박사(毛詩博士)와 공장(工匠)·화사(畵師)를 구해왔다. 이 밖에 불교 교단의 정비, 왜에 불교를 전파하여 종교 문화적인 기여랄까 중흥을 마련해 주었다. 특히, 526년(성왕 4)에 율(律)을 구하기 위해 겸익이 인도에 파견되었다. 그는 중인도의 상가야대율사(常伽耶大律寺)에 머무르면서 율부(律部)를 연구한 후 산스크리트어로 적힌 <아담장오부율문(阿曇藏五部律文)>을 가지고 돌아왔다. 이 때 성왕은 우보(羽 )와 고취(鼓吹)로써 그의 귀국을 환영하였으며, 고승 28인으로 하여금 겸익과 함께 율부 72권을 번역하게 하였다. 그 뒤, 담욱(曇旭)과 혜인(惠仁)이 율소(律疏) 36권을 저술하여, 성왕에게 올렸고, 성왕 자신도 <비담신율서(毘曇新律書)>를 지었다고 전할 정도로 불경에 조예가 깊었다. 이러한 율부의 번역과 율서의 편찬을 통해 백제 불교는 계율주의적(戒律主義的)인 성격을 지녔음을 알 수 있다.
백제는 475년 겨울 이후 538년까지 64년간 공주에 도읍하였다. 공주는 당시 웅진성(熊津城)으로 불리었는데, 왕성의 위치에 관해서는 공산성(公山城)을 그 배후 산성으로 지목하는데 이론이 없다. 공산성의 ‘공’은 ‘곰’ 즉, 웅(熊)을 나타내는 것이다. 이는 공산성 앞을 흘러가는 ‘금강’이 웅수(熊水)의 ‘곰강’에서 아화(雅化)되었듯이, 공산성의 경우도 ‘곰산성’ 즉 웅산성(熊山城)을 가리키고 있는데서도 뒷받침된다. 왕성인 공산서과 관련한 제반 시설을 살피기 위해서, 다음과 같은 <삼국사기>의 기록을 적출해 보았다.
위의 기록을 통해, 궁을 여러 차례 중수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는 체제 정비와 왕권의 신장에 비례하여 왕궁을 계속 확장시켰음을 뜻한다. 남당에서 국왕이 군신들과 연회를 한 것을 볼 때, 남당은 국왕의 행보가 자유로운 궁성 안에 소재한 것으로 보인다. 문제는 왕궁의 위치이다. 그 관건이 되는 것은 궁 동쪽에 소재하였다는 임류각의 존재이다. 임류각의 위치 비정과 관련하여 그 근거가 되었던 것은, ‘류(流)’자 명문 기와의 출토지였다. 그 출토지는 공산성 동문지에서 밖으로 동남쪽 20m지점에 소재한 토성 안의 만아루지(挽阿樓址)와, 공산성 안의 동편에 소재한 장대지와 추정 임류각지를 비롯하여 공산성 동벽 바깥이다. 특히, 공산성 동벽 바깥에서 출토된 명문기와에는 ‘임류각’ 3자가 뚜렷하였다고 한다. 이러한 사실을 통하여 임류각 관련 명문기와는 크게 볼 때, 공산성 석성 안의 동편과 석성 바깥의 토성 안이라는 2곳에서 출토되었다. 그러므로 현재로서는 임류각이 공산성 석성 안에 소재하였는지 토성쪽에 소재하였는지는 쉽게 식별되지 않는다. 그러나 임류각지를 어디로 비정하든 왕궁은 현재 공산성의 남문인 진남루 바깥 남쪽 일대가 된다. 그래야만 궁 동쪽에 임류각이 소재한다는 기록과 부합되어진다. 그러나 임류각은 그 이름대로 물에 임해야 한다고 할 때, 아직까지 고고학적 물증은 확인되지는 않았지만, 공산성의 동편 금강가에 소재한 누각일 가능성도 배제하기 어렵다. 이 경우에는 공산성과 그 남쪽의 왕궁을 함께 묶어서 궁이라고 인식했음을 뜻한다.
왕궁 위치를 시사해 주는 것은, 왕궁 남쪽에서 크게 사영하였다는 기록이다. 왕궁을 현재의 견해대로 공산성 안에서 가장 넓은 대지인 쌍수정 광장으로 비정한다면, 과연 ‘크게 사열(大閱)’ 하기는 어렵다. 왜냐하면, 쌍수정 광장은 많은 관청을 포함하는 한 나라의 왕궁 부지로서는 비좁다는 지적이 있기 때문이다. 쌍수정 앞의 부지에는 건물지가 확인되고 있는데, 이 건물지의 남쪽에 적어도 수천 명의 사병이 운집할 만한 공간은 없다. 그러므로 왕궁은 자연 공산성을 뒤로 끼고 있는 그 남쪽 일대로 보는게 무리가 없다. 이 견해가 맞는 것이다. 물론, 공산성 자체를 궁성의 한 범주로 간주한다면, 진남루 남쪽의 평지는 사열할 수 있는 부지로서 적합하다.
왕궁에는 연못이, 웅진 도성에는 저자도 존재하고 있었다. 그리고 동성왕이 남단에서 천지에 제사를 올린 것을 볼 때, 남단이라는 제단이 공주의 남쪽 산지대에 소재하였을 것이다. 웅진도읍기에 창건된 확실한 사찰로서는 반죽동의 대통사지(大通寺址)가 있다. 이 절터에서 ‘대통(大通)’ 명문의 기와편이 다수 출토되었을 뿐 아니라, 당간지주와 석조(石槽)등이 남아 있었다. 그리고 금당과 강당지의 기단부가 확인된 바 있다. 이 절은 양나라 무제를 위하여 양(梁) 대통(大通) 원년 정미년(527)에 창건한 것으로 전한다. 이런 연유로 대통사라는 절 이름이 기원했다는 것으로, 당시 백제와 양나라의 관계가 밀접하였음을 상징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