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석기시대는 청동기의 유입·사용과 더불어 전혀 새로운 시대를 맞게 되었다. 우리나라에서 청동기시대로의 이행은 지역에 따라 다소간의 차이는 있으나 기원전 9세기 경으로 내려보는 견해도 있다. 그러나 현재로서는 기원전 700년경으로 보는 것이 가장 안정적인 견해이며, 그 하한은 대략 기원 전후한 시기까지 계속되었다. 청동기 시대는 당시 사용된 동검의 형태를 기준으로 다시 전기와 후기의 2시기로 나누고 있는데, 그 경계는 비파형동검이 세형동검으로 변화하는 기원전 300년 경이다.
청동기시대를 특징짓는 가장 큰 요소는 농경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는 점이다. 그리고 농경은 정착생활을 가능하게 함으로써 취락의 형성을 가져왔으며, 이로 인해 농경이 가능한 지역에서는 정주취락(定住聚落)이 출현하게 되었다.
청동기시대의 유적은 주로 강을 따라 펼쳐진 평야를 눈앞에 둔 구릉상에 분포하고 있는데, 이것은 청동기인들이 목축·사냥 이외에 재배·농경에 크게 의존하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당시 농경생활의 흔적은 곡물의 흔적이나 반월형석도·삼각형석도 등과 같은 농경도구를 통해 확인된다. 재배작물은 조·기장·수수·콩과 같은 곡물류에서 보듯이 주로 밭곡식이었으며, 부분적으로 벼농사가 시작되었다.
공주지역과 가까운 부여 초촌면 송국리의 집자리에서 출토된 탄화미(炭化米)는 당시 벼농사가 이루어졌음을 말해준다. 농경과 함께 동물의 가축화도 현저하게 진행되어 이제까지 수렵에 의존하던 것에서 벗어나 식량의 안정적 공급이 어느 정도 가능해졌다. 그렇지만, 수렵과 어로는 여전히 행해졌으며, 경남 울주의 반구대암각화는 당시 수렵·어로생활의 모습을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다.
주거생활은 신석기인들과 마찬가지로 수혈주거지에서 살았으며, 여러 가지 면에서 발전된 형태를 보인다. 수혈주거의 평면형태는 원형에서 장방형으로 바뀌고 있으며, 면적도 넓어져 80㎡에 이르는 것도 있다. 그러나 대부분 20㎡ 정도이며, 수혈의 깊이는 50㎡전후이다.
신석기인들은 일정한 규모의 취락을 이루고 살았으나, 청동기시대에 들어오면서, 농경생활의 영향으로 한 곳에 오랫동안 정주할 필요가 생기게 되어, 취락이 보다 밀집화되고, 동시에 영역이 넓어지는 현상을 나타내었다.
청동기시대의 무덤으로는 지석묘(고인돌)와 석관묘(石棺墓)가 대부분이다. 그런데 대규모의 지석묘가 만들어지고 있는 사실을 통해 상당한 권력의 소유자가 출현하였으며, 또한 세습되었음을 보여준다. 이러한 특권층의 대두와 함께 일정한 영도권 내지는 지배권을 둘러싼 공동체간의 대립·항쟁과정에서 원초적인 형태의 국가가 출현하였는데 이를 성읍국가(城邑國家)라고 칭한다. 그리고 예술활동은 농경의 발달에 따라 더욱 진보하였다. 특히 주술이 크게 발달하였는데, 다양한 종류의 청동유물을 통해 알 수 있다.
공주지역의 청동기문화는 인접한 부여 송국리유적의 주변문화로서 확인되고 있다. 부여 송국리유적은 청동기시대의 전기와 후기의 전환점이 되는 우리나라 최대의 취락지유적으로 이곳에서 비파형동거(琵琶形銅劍)이 발견되어 그 중요성이 부각되었다. 또한 이 유적에서 출토된 토기는 송국리형토기로 불리고 있으며, 주거지는 송국리형주거지라고 하여 하나의 문화권으로 설정되고 있다. 이 문화권역에 속하는 지역으로는 공주를 포함한 충남의 서북부지역에 해당하는데, 대표적인 유적으로는 서산해미의 휴암리유적, 보령의 관창리유적, 전북 익산의 석천리 옹관묘등이 있다.
이제까지 공주지역에서 발견된 청동기시대의 유적은 그리 많은 편은 아니나, 최근들어 조사례가 증가하고 있어, 당시의 생활상을 이해할 수 있는 많은 자료를 제공해주고 있다. 이들 유적은 주로 송국리유적과 인접해 있는 지역에서 다수 조사되고 있다. 그러면, 공주지역에서 조사된 청동기시대의 개별 유적에 대한 검토를 통해 당시의 사회상을 살펴보기로 하겠다.
공주에서 청동기시대 유적이 가장 많이 분포하고 있는 지역은 부여 송국리와 인접하고 있는 탄천면 일대인데, 이곳은 지형상 넓은 들판과 하천을 끼고 있으며, 주변으로 나즈막한 야산들이 둘러싸고 있어, 청동기인들의 생활에 알맞은 지리적 조건을 구비하고 있다. 탄천지역에서 조사되는 유적의 성격은 크게 주거유적과 분묘유적으로 나누어 볼 수 있는데, 청동기시대인들의 생활상을 직접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유적들이다.
탄천 남산리유적은 송국리유적과 동일한 문화권으로 송국리 지역에서 취락시설 등 생활유적이 주로 조사된 점과는 달리 남산리 일대는 분묘유적인 토광묘와 옹관묘등 매장유구가 집단적으로 분포하고 있다. 또한, 탄천 송학리 일대에도 이와 동일한 유구가 분포된 것으로 조사되었다. 이들 지역에서 확인된 매장방법으로는 주로 옹관을 사용하여 사체를 처리한 것으로 밝혀졌다. 높이가 50~60cm되는 무문토기 단지를 땅에 거의 수직으로 묻고 돌로 뚜껑을 한 형태이며, 단지의 밑부분에서는 조그만 구멍을 내어 사체로부터 흐르는 물이나 고이는 물이 빠질 수 있도록 하였다.
반면에, 최근 장선리 지역에서 주거지를 비롯한 많은 청동기시대 유구가 조사되고 있다. 1999년에 조사된 유적의 양상을 보면, 송국리형 주거지 4기, 저장구덩이 19기, 석관묘 6기등이다. 그리고 2000년에 조사된 유적에서는 송국리형 주거지 14기, 원형유구, 석관묘등이 조사되어, 이 일대가 부여 송국리와 함께 청동기시대 주요한 생활터전 가운데 하나였음을 보여준다. 그리고 용성천이 흐르고 있는 이인면 산의리에서는 원형주거지 3~4기가 조사되었으며, 무문토기·석촉등의 유물이 함께 수습되었다. 탄천면 분강리유적의 경우 석관묘 8기가 조사되었는데, 송국리석관묘와 구조가 비슷하여 같은 시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외에도 주변에는 많은 청동기시대 유적이 분포하고 있다. 부여의 송국리유적을 비롯하여 남산리, 산의리, 송학리의 옹관묘, 성리고인돌, 이곡리입석, 초봉리고인돌, 구암리고인돌 등이 있어, 공주지역에서 가장 많은 청동기시대 유적이 분포하고 있다. 원형주거지 3기가 확인된 태봉동유적은 낮은 구릉상의 정사부에 위치하고 있는데, 금강 본류와는 약 2km정도 떨어져 있으며, 바로 남으로 금강의 지류인 검상천이 흐르고 있다.
청동기시대 유적이 많이 분포하고 있는 지역 가운데 하나는 우성면 일대인데, 이곳은 지형상 낮은 야산과 조그만 두 개의 하천을 끼고 들판이 형성되어 있어, 선사인들이 생활하기에 좋은 환경을 갖추고 있다. 우성면 귀산리의 나지막한 구릉성 산지역에서는 송국리형주거지 8기가 조사되었는데, 원형3기, 말각방형5기이며, 석촉·반월형석도편·갈돌이 출토되었다. 이 유적은 공주에서 처음으로 발견된 송국리형주거지로 해미 휴암리유적이나 부여 송국리유적과의 연관성을 밝힐 수 있는 중요한 유적으로 평가되고 있다.
이와 같은 유적외에도 공주에서는 여러 지역에서 산발적으로 이 시기의 유물들이 출토되고 있으며, 장기면 일대도 청동기시대 유적이 주로 입지하는 지형과 비슷한 지리적 조건을 이루고 있어 청동기인들의 생활유적이 분포할 가능성이 높은 지역이다.
그렇지만, 아직까지 공주지역에서 대규모로 형성된 청동기시대 유적들은 조사되지 않았는데, 이러한 점으로 보아 당시 이 지역에는 들판과 소하천을 끼고 있는 낮은 야산 등 생활환경이 좋은 곳을 중심으로 사람들이 소규모 단위로 생활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주거지 이외에 청동기시대의 사회상을 알 수 있는 중요한 유적은 고인돌이다. 고인돌은 거석문화(巨石文化)의 일종으로 청동기시대에 무덤으로 사용된 것이나 농경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었음을 알려져 있다. 따라서 고인돌의 분포는 주변에 취락이 형성되어 있었음을 알려주는 고고학적 증거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특징을 가진 고인돌은 주로 동북아시아에 분포하고 있으며, 특히 한반도는 고인돌이 집중되어 분포하고 있는 지역이기도 하다. 고인돌의 형식은 일반적으로 한강을 기준으로 북방식과 남방식으로 분류되는데, 북방식은 탁자식이고, 남방식은 기반식(基盤式)과 개석식(蓋石式)으로 다시 구분된다. 공주지역에서 발견되는 고인돌은 대부분 기반식에 해당된다. 현재까지 조사된 고인돌 유적으로는 탄천면 남산리의 고인돌 3기, 분강리고인돌 1기, 사곡면 호계리고인돌 1기, 반포면 국곡리고인돌 1기, 이인면 초봉리고인돌 3기, 구암리고인돌 3기등이 있다.
이 외에도 거석문화(巨石文化)의 일종이며, 신앙과 관련된 유적으로 선돌(입석[立石])이 있다. 다만 현재 남아있는 것들이 모두 선사시대에 세워진 것으로 볼 수는 없으나, 청동기시대의 문화전통을 보여주는 자료로 주목된다. 이들 유적이 남아있는 지역으로는 장기면 평기리·당암리, 이인면 신흥리·이곡리, 반포면 상신리·국곡리·원봉리, 탄천면 남산리·가척리, 유구읍 입석리, 우성면 보흥리, 계룡면 향지리, 공주시 검상동 등이다. 공주지역 청동기유적의 분포상을 보면, 산지가 많은 북부지역 일부를 제외하고는 거의 전지역에 걸쳐 분포하고 있다. 특히, 금강의 지류인 소하천을 끼고 발달한 평야지대와 가까운 지역에 많이 분포하고 있어, 공주지역에 거주했던 청동기인들이 활발한 생산경제 활동을 하였음을 알 수 있다.
거주민의 일상적인 경제활동 영역에서 부쉬맨의 식량채집 집단과 유럽 농경민들의 토지활용 범위를 토대로 하여 산출한 활동범위는 수렵채집인들은 대체로 반경 10km, 농경인들은 반경 5km라는 연구가 있는데, 금강의 한 지류인 갑천유역 선사유적을 토대로 산출한 활동영역을 보면, 신석기시대가 약 8km(반경 4km), 청동기시대 초기지석묘사회가 약 7km(반경 3.5km), 지석묘사회가 약 5km(반경 2.5km), 지석묘·입석사회가 약 4km(반경 2km)로 산출되었다. 공주지역도 갑천지역과 같은 금강권역으로 생활환경이 비슷하였을 것이므로, 이와 같은 통계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을 것이다.
기원전 4~3세기경이 되면, 중국문화의 영향을 강하게 받으면서 철기문화가 유입되고, 그 영향은 다시 남부지역까지 파급되었다. 남부지역에는 확인되는 이 시기의 유물로는 한국식 청동칼과 청동거울, 그리고 주조철부 및 철착, 유리제 관옥 등이 있다. 주거지는 청동기시대와 큰 차이를 보이지 않지만 화덕자리가 벽에 더욱 가까워지거나 화덕대신 구들을 사용한 예가 있어, 주거지 내부에서의 생활공간이 더욱 확대되고 난방방법이 새롭게 개발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철기의 사용은 생활의 양상을 여러모로 변화시켰는데, 특히 철제농경구의 출현으로 농업이 크게 발달하였다. 농업생산력의 향상은 부의 증가를 초래하였으나, 오히려 빈부의 격차는 더욱 확대되어 보다 큰 정치체의 출현을 가져왔다. 이를 연맹왕국(聯盟王國)으로 규정할 수 있으며, 중앙집권화가 이루어지기 이전 단계이다. 공주를 포함한 한강이남 지역은 원삼국시대(原三國時代)가 형성되기 바로 이전의 사회에 해당된다.
공주지역에서는 청동기시대를 비롯한 원삼국시대의 유적은 다수 조사되었다. 그러나, 이들 두 시기를 이어주는 초기 철기시대의 유적은 거의 확인되지 못하고 있다. 따라서, 당시 공주지역에서 전개된 사회상을 알 수 있는 자료는 아직은 빈약한 실정이다. 그 이유는 유적·유물이 산발적으로 분포되어 있어, 발굴조사 등을 통해 확인하기 어렵다는 점에 있다.
공주지역에서 처음으로 확인된 초기 철기시대의 유적은 장기면 봉안리이다. 이 곳에서는 한국식 청동칼과 청동거울, 유리제 관옥 등이 수습되었다. 유적은 대교천을 바라보는 나지막한 구릉(해발 30m)의 정상부 남쪽에 위치한다. 정확한 유구의 형태는 알 수 없으나, 토광묘 또는 목관묘로 추정되고 있다. 이 유적은 비록 철기유물이 부식되어 없어졌지만, 공주지역에서 확인된 유일한 예이다.
그러나, 청동기시대 유적이 다수 분포하고 있으며, 철기문화의 유입으로 인해 농경도구 및 각종 공구의 발달로 농경이 크게 발전한 상황을 고려해 볼 때, 농경에 적합한 지리적 조건을 구비하고 있었던 공주지역에 철기시대에도 많은 취락들이 형성되어 있었을 것이라는 점은 쉽게 상상할 수 있다.